[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온 친구가 전해줄 선물이 있다고 했다. 달콤한 귤이겠거니 하고 만났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귤 상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귤이야 다 제주도에서 왔겠지만 금방 딴 싱싱한 귤을 머릿속에 그렸던지라 조금은 아쉬웠다. 반면 어떤 선물일까, 더 궁금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것인지 바로 선물을 꺼내 놓았다. 두툼한 종이봉투를 열어 보니 알록달록한 연필이 들어 있었다.

순간 연필을 먹을 수 있다면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할 것 같았다. 연필이 그만큼 예뻤다. 친구는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고 또 글을 쓰는 내게 연필생각이 떠올랐나보다.

새 공책이나 메모지에 쓰윽쓰윽 정성껏 글 쓰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파란색 연필은 제주의 바다냄새가 날 것 같았고, 주황색 연필은 귤 냄새가 잔뜩 묻어날 것 같았다.

노트북으로 글을 쓰면서부터 조금씩 연필과 멀어진 것 같다. 그 전에는 연필과 볼펜을 사용했다. 연필은 쓰는 것도 좋지만 깎을 때 더 신경을 썼다. 연필에 대한 예의랄까? 연필깎이로 깎지 않고 주로 커터 칼로 정성스레 깎는다.

그렇게 깎아 연필꽂이에 꽂아 놓은 연필들. 예전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연필이 아주 귀했다. 한 다스씩 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더 많았다. 꾹꾹 눌러 써도 흐리게 나오던 연필.

그러던 어느 날 연필심이 아주 진한 게 나왔다. 지금도 그 연필 이름을 기억할 정도다. '흑진주' 라고, 지금 생각해도 어찌나 이름을 잘 지었는지 모른다.

커터 칼로 처음 연필을 깎을 때는 마음처럼 예쁘게 깎지 못했다. 대신 손에 촉촉하게 땀이 배었다. 손이 베일까봐 온 신경이 손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번 피가 난 적도 있지만 어느 정도 지나면 잘 깎을 수 있었다.

저녁에 숙제를 다 마치고나면 연필은 뭉툭해 진다. 그러면 다시 연필을 뾰족하게 깎는다. 그런 다음 필통에 가지런히 넣는다. 작아진 몽당연필까지 지우개 옆으로 잘 놓으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래도 가끔은 잘 깎은 연필심이 뭉툭해질 때도 있다. 학교를 오고 가는 길 뛰다 보면 플라스틱 필통 속 연필심이 툭, 부러졌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은근히 속이 상했다. 그때 누군가 알려주었다. 다 먹은 사탕봉지나 껌종이를 채 썰 듯 잘게 잘라 필통 바닥에 뿌려 놓는 거였다. 그러면 정말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았다. 아마도 연필의 부딪히는 충격이 덜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연필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아주 작아져 몽당연필이 되어도 아이들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샤프가 나온 다음부터 그 인기는 시들해졌다. 게다가 점점 학생 수도 줄었으니 더 할 것이다.

그런데 요즘 다시 연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소식을 접한다. 내 주변에도 연필로 짧은 감성의 글을 담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 글을 액자에 담아 걸어 놓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의 모임도 있다고 하니... 그들도 나처럼 오래 전 추억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건 아닐까 싶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아, 얼마 전 집안 정리를 하다 고등학교 때 쓰던 화구박스를 발견했다. 낡은 화구박스를 여니 붓과 4B연필 몇 자루가 들어 있었다. 예전 이젤 앞에서 그림 그리던 생각이 났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고, 지우개로 지우고를 반복하던 수많은 시간들. 새해에는 시간을 내어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그림을 꼭 그리고 싶다. 사각사각 끝을 뭉툭하게 깎은 4B연필로 내 삶의 풍경을 담고 싶다. 벌써부터 사각사각 연필 깎는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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