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우리 집에 작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졌다. 80평생 삶으로 터득한 지혜의 창고가 사라진 것이다. 고단한 삶을 사셨던 아버지는 편안하고 인자한 얼굴로 주무시듯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내 삶의 뿌리요 하늘이 무너지는 큰 슬픔이었다. 5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갑자기 황망한 일을 당하고 보니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가신 님 자리가 너무나 컸다. 발 동동 구르며 남은 가족들이 해야 할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미리 유언장을 써 놓았더라면, 아니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숙제임이 분명하다. 올 해가 가기 전 자신을 정리하는 유언장을 써 볼 일이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나의 울타리고 영원한 큰 산이었다. 행복했던 순간들과 소소한 추억들이 시나브로 떠오른다. "밖에 나갈 때 바로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은 돌려서 가지런히 놓고 들어와라. 때와 장소에 따라 격식에 맞는 옷을 입어라. 밝은 얼굴로 인사를 잘하는 것이 가정교육의 기본이다." 그가 했던 말이 그의 행동들이 끈으로 이어져 새록새록 기억의 둥지를 튼다.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킨 굽은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서있고 탁 트인 하늘이 펼쳐진 그 곳에 아버지의 집을 마련했다. 먼 훗날 엄마와 함께 나란히 누워 계실 자리에 따듯하고 폭삭한 흙 이불을 덮어드렸다. 아버지를 모셔두고 돌아오는 길에 바라 본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고맙다. 사랑한다. 잘 살다가 다시 만나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곳곳에 남겨진 아버지의 흔적이 바로 아버지의 유언이고 유산이다. 바람 불면 바람으로 눈이 오면 눈이 되어 공기처럼 그렇게 내 곁에 머무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 몸으로 삶을 살아내신 아버지의 숨결이 가슴에 숭숭 구멍 뚫려 비가 내리고, 꽃으로 향기로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렇게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고백했던 시인(詩人)의 말아 생생하게 다가온다. 너도 나도 본향을 향해 가는 길이기에 그리 슬퍼 할 일은 아니다. 그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지만 나도 내 아버지를 따라 그렇게 가게 될 것이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갑작스런 이별이 아쉬울 뿐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하고 싶은 말. 꼭 해야 할 말들을 유언장(遺言狀)으로 미리 남기는 숙제를 꼭 해야겠다.

'결혼생활 38년 동안 뭐든 알아서 미리 다 해 주다보니, 혼자서는 어설프고 서투른 당신이 애들보다 더 걱정이오. 혹시라도 내가 먼저 가거들랑 너무 슬퍼하지 말고 부디 몸 잘 챙기고 건강하게 살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있는 내 동생들. 특히 건강이 좋지 않은 장남. 그동안 열심히 치열하게 잘 살았다. 영적인 대화를 하면 눈물 쏟는 너는 분명 택한 백성이야. 마지막까지 천국소망으로 살아가길 바래. 호주시민 된 막내는 부디 좋은 여자 만나 새 출발 해 행복한 노년을 보내면 참 좋겠다. 반듯한 모범생 똑똑하고 은혜가 넘치는 조카들 유학생활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착한 동생. 아들 딸 좋은 배필 만나는 형통의 복이 넘쳐나길 기도할게. 아버지 먼저 보내고 힘들어 하시는 어머니. 마음 단단히 먹고 홀로서기에 성공하셔서 건강하고 당당한 노후를 보내시길.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함께했던 소중한 사람들, 마음을 나눈 친구들, 교우들 모두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외할머니, 친정엄마 그리고 나의 분신 4남매, 손주들. 그러니까 외조모부터 우리 손주들 까지 5대 째 이어 온 믿음의 가문임을 명심하길. 하늘나라에서도 엄마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너희들을 지켜보고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을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신앙 잃지 않고 대대손손 축복 받는 기독 명문 가문을 이어가기 바란다. 고맙고 감사해 그리고 사랑해.'

휴우~ 힘들고 어려운 숙제 한 꼭지를 오늘 해 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