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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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22.01.02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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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뜨락] 조영의 수필가

오래되어서 기억하지 못하는 물건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당장 필요하지 않아 깊숙이 두었다던가, 쓸모는 없지만 언젠가는 다른 용도를 사용하지 않을까 재활용하려고, 물건 값이 비싸서 긴 할부금 갚으며 내내 후회했던 쓰린 기억 때문에, 추억과 미련과 아쉬운 만큼 공간을 차지하고 가끔 내 기억을 두드리는 것이 물건뿐일까.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컴퓨터에는 또 다른 용도로 저장된 공간이 많다. 우연한 경로로 들어간 파일 속에서 오래된 나와 만나는 공간은 낯설고 새롭다. 마치 지난 일기장을 보듯 떨리는 순간과도 마주 한다.

그의 부음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가면서 내가 많이 좋아했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데도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나를 맞이한 것은 텅 빈 공간 속 고인의 캐리커처 얼굴이었다. 한쪽에 유품과 저서가 놓였기에 엉거주춤 앉았다. 주인 허락 없는 들어와 그의 흔적을 느끼는 것처럼 멋쩍었지만 아무도 없음이 나는 고마웠다.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 한 번도 둘만의 시간은 없었던 긴 짝사랑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문학 창작 프로그램의 첫 수업 첫 시간, 강사는 지각했다. 그러나 의연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들어왔다. 미안한 웃음인지, 반가움인지, 쑥스러움인지 모를 웃음 때문에 잠시 술렁이던 실망의 감정을 아무도 드러내지 못했다. 그와 마주하는 내내 모두는 깊숙한 고요 속으로 빠졌는데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과 어깨에 멘 낡은 악기 끈이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수업 후 몇몇이 모였다. 뒷담화려니 했는데 순한 첫인상과 평범하지 않을 것 같은 행동이 매력이라며 기대에 부풀었다. 그 중 L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나도 언니만큼 빠져있었다. 사제 간으로 만났지만 문학으로 동행의 길을 걷던 그와 송홧가루가 날리는 오월, 스승의 날 즈음 만나고 소식이 끊겼다. 바람이 바람처럼 살아가는 소식이 날아오고, 그의 시가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낭송되고 아끼는 것을 보면서 처음 그가 웃었던 묘한 웃음을 흉내 냈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집에 돌아와 오래전 만들어 놓은 홈페이지를 열었다. 생각나지 않는 비번은 녹슨 열쇠처럼 덜컹거리고 타임캡슐 같은 방에서는 묵은 시간의 냄새가 났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좋은 사람 생각에 써놓은 몇 편의 시와 연애편지 같은 작가 노트, 좋은 느낌의 풍경들. 멈춘 날짜는 과거인데 기억은 늙지 않아서 오늘처럼 마주한다. 따뜻했고 고마운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단단해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클릭 한 번으로 사라지는 냉혹한 컴퓨터 공간과 추억하고 싶은 감성의 모순을 이젠 견뎌야 한다. 삭제할까요? 첫 만남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숨 막힌다. 손끝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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