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 잔]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

유튜브에서 걸으며 거리를 촬영한 영상을 하나 보았더니, 매일매일 비슷한 영상이 추천돼 보인다. 런던 시내의 중심가를 걷는 영상이 나오는가 하면, 눈 내리는 밤 석촌호수 인근을 걸으며 촬영한 것도 있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고부터는 주행하는 차량에서 녹화한 것으로 보이는 영상까지 가세하여 요즘은 추천 영상의 1/3이 그런 종류가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릴없이 그런 영상을 자주 보고 있게 된다. 뭔가 매력이 있다. 하긴 어느 나라에서는 운행하는 열차의 조종실에서 촬영된 영상을 하루 종일 내보내는 방송까지 있다고 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한국 철도 TV라는 유튜브채널이 개설되어 현재까지 25개의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조회 수가 많은 것은 12만 회가 넘는다. 한국 철도공사의 공식 채널로 우리나라의 철도 노선 중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들을 조종실에서 보는 것처럼 볼 수 있도록 촬영하여 제공한다. 예를 들면 서울에서 서원주까지 또는 충주에서 부발까지의 영상 이런 식이다.

가끔 서울을 가기 위해 오송역에서 KTX 열차를 탈 때가 있다. 기차를 타면 오송에서 서울까지 가는 철길 주변의 풍경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본능적으로 창밖으로 시선이 간다. 때로는 사진을 찍기도 하고, 동영상을 촬영해서 SNS에 올리기도 한다. 아무 내용도 없이 거리를 걸으며 주변의 건물, 골목길, 가로수 등을 보여주는 영상에 끌리는 이유가 이런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풍경을 인식하려고 하는 본능적인 끌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에는 가끔 뵙는 형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식론에까지 이르렀다. 인식론은 쉽게 말해서 '안다고 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좀 더 풀어서 예를 들자면 '창밖의 풍경이 아름답다'라고 내가 인식했다면,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면 '내가 인식했던 아름다운 창밖의 풍경'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세상은 나로부터의 인식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내가 없다면 내가 인식하는 세상도 없으므로 '내가 죽으면 내가 인식했던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어릴 때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길에 서면, 그 당시 내가 인식했던 세상이 그 안에 있다. 기억 속에서 소환해 내는 전봇대와 담장, 파란색 대문과 소박한 명패부터 친구들의 얼굴까지, 그리고 외상이 통하던 동네 구멍가게의 간판과 이맘때면 전기장판 위에 담요를 무릎까지 덮고 앉아계시던 주름 깊게 팬 아주머니의 모습까지 있다.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
이상조 다락방의 불빛 대표

아주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집단적인 기억까지, 어쩌면 추억이라는 것은 우리들이 함께 인식했던 특정한 날의 기억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가 한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접하는 세상에 대하여 같은 인식을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필자는 7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1999년에는 이제 곧 종말이 올 것이라며 시끄럽기도 했다. 동시대를 살아서 비슷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에게서 따뜻한 동질감을 느낀다. 같은 세계를 공유했던 우리들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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