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칼럼] 권택인 변호사

"권변이 거시기를 해야겠다." 외도를 권유받았다. '거시기'는 다름 아닌 TV방송출연. 방송출연은 어쨌든 이름을 지역사회에 알리는 것이 필요한 변호사에게 득이 된다. 방송국의 시사토론 패널로 방송을 했던 경험을 통해 그 이득을 잘 알고 있었다.

고민없이 덥썩 물뻔했다. 시사토론 패널은 법조인이 사무실이 아닌 TV에서 법적인 지식을 풀어놓는 것뿐이어서 별다른 곤란함 없이 무사히 끝낸 적이 있었고, 지인이나 의뢰인들로부터 셀럽(?) 대우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거시기'는 격이 달랐다. 지역방송국에서 새롭게 편성한 일종의 예능(!)프로그램이었다. 심지어 출연자가 노래(!)를 하는 코너도 있다고 한다. TV에 나와 노래 한 자락 뽑는 것이 뭣이 대수겠는가! 하지만 노래방을 끊은 지 수년이 되어가고 방송에 노출할만한 가창력의 소유자가 아닌지라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방송일까 궁금하여 기존 방송을 스크린해 보니 정말 노래를 부르고들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 신나는 트로트를 불렀다. 프로그램 편성의도가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에 지친 시민들의 흥을 돋우려는 것이었던 터라 흥겨운 '뽕짝'이 어울렸던 듯하다. 어쩌면 내가 좀 더 어렸다면 방송출연을 먼저 자청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나의 텐션을 넘어선 '뽕짝' 영상을 보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어린 시절 롹스피릿(Rock spirit)을 장착하고 "말달리자" 떼창을 유도하거나 '좐인한~ 여자라~'를 유도하며 흥의 끝판을 주도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오래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술에 흠뻑 젖어 친구들과 장난삼아 한 짓(?)이어서 어엿한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시는 술취한 친구들을 선동하여 광기어린 분위기를 만든 후 살짝 빠지는 스킬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모임에서 전체 분위기를 챙겨야 하는 자리에 익숙해 지다보니 흥은 후배들에게 넘기고 뒷수습하는 역할에 익숙해져 있던 내게 '뽕짝'은 무리였다.

게다가 자칭 반항적인 락스타(Rock star)가 '뽕짝'을 불렀을 리도 없다. 때문에 방송에서 '뽕짝'을 부른다는 것은 오래전 대한민국 최고의 락그룹이었던 백두산의 장발 리더 유현상 형님이 갑자기 머리에 포마드 기름 바른 머리를 2대8로 뽀개고 트로트 가수로 전향할 때와 같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거시기'를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혼자서 유튜브를 켜고 트로트를 검색해서 연습해 보았다. 하지만 도무지 흥이 살지 않는다. 맛깔나게 꺾으며 트로트를 부르는 '미스터 트롯'의 젊은 가수들이 왜 대한민국을 들끓게 했는지 알 것 같다. 한숨이 깊어질 무렵 프로그램 작가님으로부터 나는 노래를 안해도 된다는 전갈을 받았다. 다행이다. 전격적으로 촬영일정에 합의하였다.

우리 로펌소속 선배 변호사 한 분과 퇴사 후 사내변호사를 하는 후배를 섭외하는데 성공했다. 나의 계획은 점잖은 선배님이 무게를 잡아주고 하이 텐션의 후배가 분위기를 띄워주면 나는 그냥 평범한 캐릭터로 숟가락 하나 얹는 것이었다. 미리 작가가 취재를 했고, 취재에 따라 작성된 대본을 숙지하였다. 좋아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어….

녹화가 시작되었다. 저세상 텐션인 MC들은 재미를 위해 계속 애드리브를 날렸다. 선량한(?) 변호사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피리부는 소년을 따라가는 쥐떼들처럼 우리는 순순히 MC의 의도대로 MSG섞은 폭로를 해댔다. 의지와 상관없이 큰 파도에 쓸려가는 느낌이랄까. 급한 내리막길에서 통제력을 잃고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기분이랄까.

권택인 법무법인 충청 변호사·법무부교정자문위원
권택인 변호사

입만 털면 된다고 했던 프로그램 녹화는 결국 나의 멘탈을 탈탈 털고 나서야 끝이 났다. 하지만 망가졌지만 품격을 잃지 않았고, 일에는 예리하지만 인간미 넘치는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자평하고 싶다. 정신은 없었지만 결코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등 떠밀리듯 했던 외도는 뜻하지 않은 힐링을 주었다. 이런 긍정적인 외도라면 종종 해도 될 것 같다. 이참에 '뽕짝' 연습도 해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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