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박성진 정치행정부장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는 단어가 '유감(遺憾)'이 아닐까 싶다. 툭하면 유감이라는 단어를 끌어다 붙인다. 제멋대로 쓰다보니 이제 무감각할 정도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감이라는 표현이 차고 넘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비호감 대선' 탓인지 경쟁 후보를 깎아내리기 위한 상호 공격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세다. 후보 뿐이 아닌 배우자 리스크가 있어, 예년과 달리 전선이 넓다는 것도 공격의 빈도가 증가한 이유다. 총알을 막무가내로 퍼붓다보니 오발도 많다. 덩달아 유감 표명할 일도 다반사다. 여야 유력 후보 간 상호 네거티브가 도를 넘다보니 더 그렇다. '기면 기고, 아니면 그만이다'라는 식의 마구잡이 음해성 발언이나 행동으로 국민들은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제는 뭐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인 사실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무작정 내뱉은 뒤 상대방에서 예상과 달리 법적 조치 등 강력 대응을 천명하면, 그제야 유감 표명을 하고는 슬쩍 꽁무니를 뺀다. 습관처럼 서로 던지는 수많은 '유감 투척'에 국민들만 놀아난 듯 해 기분이 더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잘못을 시인하면서 왜 유감이라고 할까.

유감이라고 표현해야만 고상한 정치인의 품위가 유지되는 건가. 점잖은 체면에 흠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는 건가. 유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에 차지 아니해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이다.

실수를 하고는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예를 갖춰 표현하는 의미와는 차이가 있다. 만약 일상에서 유감이라는 표현을 가져다 쓴다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욕을 한바가지 먹을 게 뻔하다.

박성진 사회부장
박성진 정치행정부장

타인에게 피해를 끼쳤다고 판단되면 정확하게 사죄(謝罪), 사과(謝過), 죄송(罪悚), 미안(未安), 송구(悚懼) 등을 상황과 격에 맞게 쓰면 된다. 유독 정치권에서만 사죄와는 개념이 판이한 유감이라는 표현이 남발된다. 경제계, 학계, 연예계, 예술·문화계 등 우리 사회에서는 잘못하면 사죄, 죄송, 사과를 한다. 이게 우리 정서다. 상식적으로도 그렇다. 국민들과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단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래서 국민들은 정치인들을 딴 세상 사람들로 인식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유감이라는 표현이 고도의 정치적 수사(修辭)일지 모르지만 현실과는 괴리가 크다는 것을 명시해야 한다. 늘 다툼(토론)을 통해 이견을 좁혀가는 것이 정치이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폭로하고 의혹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실수도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주저 없이 사죄를 구하는 것이 정치인의 도리이자 용기다.

다만 '유감'이라는 품위 가득해 보이는 단어를 엉뚱하게 쓰기보다는 초등생들도 알아듣는 쉬운 말로 하자. 국민들의 언어와 정치인들의 언어가 다를 수 없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