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낯선 우편물 하나를 받았다.

보낸 사람이 전혀 기억 속에 없고, 발송지도 어떤 연관도 닿지 않은 먼 남쪽 지역에서 날아 온 책 봉투였다. 가끔 작품집을 출간하여 보내오는 문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안면이 있거나 같이 활동하는 문우들이 대부분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책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짐작 가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선뜻 봉투를 뜯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대로 그냥 둘 수도 없는 일이어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한 권의시집이었다.

'권00 25시집, 권00 26시집'

책 한 권에 두 권의 시집이 들어있다는 건가. 책 표지도 범상치 않다. 누군가의 판화작품인 모양인 듯한데, 세 개의 코와 네 개의 눈동자, 자잘하고 섬세한 타투 무늬 같은 선들이 얼굴 가득 가면을 쓰고 있는 듯 녹색의 눈동자 하나와 하늘색 눈동자 하나가 괴기스러운 모습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책을 들어 뚜르르 펼쳐보고 있는데 작은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진다. 이면지를 사용한 A4용지 반장 정도의 종이에는 찢어지는 가난과 고통 속에서 평생 시인으로 살아온 자신에게 살려주는 셈 치고 도와주면 한국 문단의 큰 별이 되어 평생 잊지 않고 보답하겠단다. 계좌번호까지.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송금이 어려우면 시집을 지금 바로 반송해 달란다. '지금 바로 반송! '

원래 예술이란 것이 등 따숩고 배부르면 훌륭한 작품 탄생이 어렵다는 것은 공감하는 바이다. 그렇다고 본인의 가난과 병마를 이용해 동정과 협박으로 삼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에 생각이 이르자 급속도로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나의 정보가 마음대로 이용되었다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한국 문단의 큰 별이라.....시집의 수준을 나름 판단해야 할 것 같아 살펴보았다. 시에 대해 깊은 조예가 없는 내 눈으로 보더라도 시어 하나하나가 조탁(彫琢)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딸과 사위에게 보낸다는 시편에는 교사인 딸과 의사 사위에 대한 자랑도 묻어 있다. 뭐지? 보살펴 줄 멀쩡한 가족도 있는데 본인은 길거리에서 죽어가고 있다고? 도무지 앞뒤 말이 맞지않다. 어쨌거나 반송도 귀찮은 일이라 책값을 보내주는 걸로 끝을 낼까 싶어 책값을 보니 예상외로 책값이 만만치 않다. 난감한 일이다.

매서웠던 겨울 날씨 속에서 봄기운이 맴돌기 시작해 산책길에 나섰다. 엊그제까지 꽁꽁이었던, 얼음 풀린 물웅덩이에 십여 마리 오리 떼들이 모여있었다. 먹이를 구하고 있는지, 물놀이를 하고 있는지 힘차게 헤엄을 치고 있길래 반갑고 신기한 마음에 가까이 가서 보려고 했는데 그만 후다닥 날아서 단체로 날아가버렸다. 나는 겨울을 잘 이겨낸 그들이 대견하고 예뻐서 좀 가까이에서 칭찬하며 보고 싶었을 뿐인데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오리 떼들에게 내 진심이 왜곡 당한 것 같아 몹시 서운했다.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진심이 온전한 진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속상하고 억울하다.

그러나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파악하고 분석해서 판단 내리는 일, 각자의 경험과 욕구가 다르고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에 오해와 진실은 그 경계가 사라지기도 한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오해였을까. 날아간 오리 떼와 생면부지 시인이 나에게 남겨 놓은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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