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한병선

당국이 다른 변이가 발행하지 않는 한 코로나19 방역패스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그동안 코로나 위험성을 강조해왔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특히 방역패스 폐지는 없다던 태도를 갑자기 바꿨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지금까지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엄중한 상황임을 부각시켰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확진자는 오히려 훨씬 더 많이 늘어 25만명을 넘나들고 있는 상황이다. 갑자기 허탈한 느낌이 들고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그렇다면 정부가 국민들의 인권보호와 불편함을 생각해서 전향적인 조치를 취한 것일까. 그것은 더욱 아닌 것 같다. 지금까지 K방역은 중국의 C방역과 마찬가지로 '반인권적 방역'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런 방역패스 폐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한쪽에서는 대통령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본다. 다른 쪽에서는 확진자 급증에 공포감을 느낀 보수 성향의 고령자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꼼수라고 한다. 이런 합리적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실제로 여당의 한 의원이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선거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코로나 관리를 요구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각자의 주장들이야 어쨌든 방역패스 폐지는 인권보호와 국민들의 불편을 덜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남은 것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마스크 의무착용 문제다. 이제는 사회적 거리가 충분히 유지되는 상황에서도 마스크는 당연히 착용하는 것으로 세뇌되었다. 쓰지 않아도 될 만한 상황에서도 남의 시선이 두려워 마스크를 쓴다. 나홀로 산책을 하거나 야외 운동을 하는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힐끗힐끗 눈치를 준다. 심지어 마스크를 쓰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도 있다. '비합리적 신념'에 사로잡힌 결과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란 말을 할 수도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이를 국가 권력이 직접 강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국민의 자유의지를 마음대로 통제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중국의 C방역을 통해 볼 수 있다. 모든 코로나19 관련 통제들이 '공공의 이익'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합리화된다. 서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마스크 시위와는 확연히 대비된다. 이들의 시위는 코로나 확산 초기부터 엔데믹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요구는 한결같다. "신체의 자유를 달라", "마스크를 쓸 권리도 벗을 권리도 나에게 있다"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공공의 이익'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는 말이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공의 이익과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비합리적인 신념에 경도된 인간은 좀비가 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 가지 사실이 옳다고 믿으면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전혀 없다.

개인의 기본권을 심하게 침해하는 방역은 민주주의 위기로 이어진다. 필자가 한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위험요소와 특정한 정치적 목적이 결합되었을 경우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중부매일 2020. 11. 05일자). 목숨이 위태롭고 건강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는 논리적 무기가 된다. 전쟁과 같은 돌발적,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효과는 더욱 증폭된다.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한병선 교육평론가·문학박사

왜 우리는 사회적 좀비가 되어가는가. 전염병 퇴치라는 명분으로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지는 제한되고 결국에는 권력이 민주주의를 침식시키는 모습을 보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게 자유와 사고능력을 제한한다면 무엇이 남을까. 코로나19 초기 열차 안에서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벌어진 사건에서 "제발 숨 좀 쉬고 살자"라는 외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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