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사람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생각은 고독하게 혼자 할 수 있어도 삶은 함께해야 한다. 집에서는 부모와 형제, 직장에서는 상사와 동료, 사회에서는 친구와 지인들과 만나면서 끊임없이 교류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각자 눈을 가지게 된다. 사람을 보는 눈, 그러니까 자기만의 관점이라고 할까, 판단 기준이라고 할까. 아무튼 사람을 보는 방법이 생겨난다. 살아오면서 참 많은 사람을 만난다. 한 사람을 만나려면 시간과 공간이 딱 들어맞아야 한다. 나는 이를'시공의 인연'이라고 부른다. 인연이 되어 만나면, 그때부터 운명이 시작된다. 부부, 친구 등의 이름으로 서로를 바라보게 된다.

논어 위정편 10장에 의미심장한 말이 나온다. 사실 이 문장을 보고, 그래서 논어가 지금도 읽히고 있구나 하고 감탄을 연발한 적이 있다. 공자는 사람을 보는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바로 시·관·찰이다. 첫째 시視는 그냥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다. 일단 눈에 보이니, 보는 것이다. 둘째는 관觀이다. 이는 좀 더 자세히 보는 것이다. '저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하지?'하고 그 이유까지 들여다본다. 둘 다 뭔가를 보는 건 같지만, 시는 육안으로 보고, 관은 뜻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찰察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살핀다는 뜻이다. 그 사람이 편안하게 여기는 바가 무엇인가 하고 꿰뚫어 보는 것이다.

와, 나는 이거야말로 사람을 보는 참 좋은 방법이구나 하고 무릎을 쳤다. 하여 나름 이를'시관찰법'이라고 명명했다. 기막힌 방법이 아닌가. 처음에는 그냥 보고, 다음에는 자세히 보고, 마지막으로 꿰뚫어 본다. 공자는 이렇게 보면 그 어느 누가 본색을 숨길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사람을 만난다. 일단 행동을 본다. 그냥 눈에 들어 오니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이 엉엉 운다. 우는 걸 보고는, 그런가 보다 하고 멍청히 있는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이 사람이 왜 울지?'하고 이유를 알아본다. 이것이 관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눈물 닦으라고 휴지를 건네주면서 그를 편안하게 한다. 그리고는 말을 들어주고 행동을 살핀다. 이것이 찰이다.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최시선 수필가·음성고 교장

어떤 사람은 시·관·찰을 사람이나 사물을 보는 3단계로 보기도 한다. 맞는 말이다. 예를 들어, 학생이 지각했다고 하자. 선생님은 규칙을 어겼으니 보는 즉시 벌은 준다(시). 어느 날 보니, 그 학생이 지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침마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보느라 늦은 것을 알았다(관). 선생님은 그때부터 지각해도 벌을 주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학생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을까 하고 살폈다(찰). 지각은 현재의 행동이고, 어머니가 편찮은 것은 과거이며, 공부는 미래이다. 과거가 현재의 원인이라면, 미래는 현재의 결과이다. 그렇다. 과거를 알려면 현재의 모습을 보면 되고, 미래를 알고 싶으면 현재의 행동을 보면 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결과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 있다.

시·관·찰! 난 이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볼까 한다. 공자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었다고 하는데(일이관지), 그런 경지는 어림도 없고 다만, 이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나아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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