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김동우 논설위원

며칠 전 대가야(大加耶)의 도읍지였던 경북 성산면 고령(高靈)을 다녀왔다.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을 한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만나기 위해서다. 김면은 조식과 이황의 제자였던 조선 중기 걸출한 성리학자였다. 효렴(孝廉:부모에게 효도하고 청렴한 자를 발탁해 관직에 임명하는 제도)과 유일(遺逸:학식과 덕망이 높아 과거시험 없이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학자)로 공조좌랑(工曹佐?:공조의 정육품) 등 다양한 관직에 올랐으나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관직을 내려놓고 의병 활동사를 빛낸 인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선조 25년)이 발발하자 고향인 고령에서 분연히 의병을 일으켰다. 김면은 의병 활동 이후 단 한 번도 갑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오로지 풍전등화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만사 제치고 의병 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만석의 가산을 탕진했고 가족은 문전걸식을 피할 수 없었다.

김면은 1593년 3월 성주 전장 막사에서 과로로 병을 얻어 숨을 거뒀다. 의병의 사기 저하와 왜군의 사기충천을 막기 위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는 충무공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 때보다 5년이나 앞선다. 충무공이 김면의 유언을 요즘 말로 벤치마킹한 것일까? 어찌 되었건 죽음 앞에서 이런 명언을 남기기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나라의 존재와 지속 이유를 알 수 있지 않은가?

김면은 숨을 거두기 직전 온 힘을 다해 붓을 들어 또 하나의 명언을 남겼다.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이다.(松庵先生集) '나라 있는 줄만 알았지, 내 몸이 있는 줄 몰랐다.' 몸을 돌보지 않은 채 나라만을 위해 왜군과 싸우다 보니 죽음을 맞아 나라 위태를 막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는 의미다. 숨지기 직전 김면의 심회(心懷)가 담긴 여덟 자의 유언이었다. 불굴의 독립 정신과 우국충정(憂國衷情)이 진하게 묻어난다. 이 글귀는 김면을 기리는 도암서원(道巖書院) 입구 바윗돌에 그의 기백과 혼이 고스란히 담긴 채 새겨 있다.

김동우 YTN 청주지국장
김동우 논설위원

지난 1일은 삼일절이다. 우리 민족이 독립선언서 발표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독립의사를 세계만방에 알려 광복의 도화선이 된 날을 기념하는 국경일이다. 일제 강점기 농민은 농기구를 무기로 삼았고, 많은 학자와 관원은 붓 대신, 스님들은 목탁 대신 죽창과 칼 등을 들고 벼랑 끝에 선 나라를 구했다. 당시 풀인들, 돌인들 어느 하나 조선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날에 임진왜란 시 온 몸을 던져 항일투쟁을 지휘한 구국 투사 김면의 우국충정을 새겨 볼 만하지 않은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