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경 수필가

나이 탓일까. 세시절기를 맞이할 때마다 동지팥죽이며, 대보름 오곡나물밥을 구실로 뭐라도 해 먹이고 싶어 하던 친정엄마의 마음이 명치에 닿아온다. 그때마다 '그게 뭐 중요해'라며 시큰둥 한술 뜨던 내가 어느새 엄마 손맛을 흉내 내며 세시음식을 챙기고 있다.

며칠 전, 정월대보름 오곡나물밥 장을 보며 '부럼 깨기' 할 땅콩과 호두를 한 되 박 사두었다. 선조들은 보름날 아침 부럼을 깨면 한 해 동안 부스럼과 종기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믿었다. 옛 풍습이라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아그작" 한번 깨물어주면 마음 한편이 편안해진다. 예방주사 맞은 든든함이랄까.

전 같았으면 딸들 아침 선잠 깨워 부럼 깨물리겠다고 소란 좀 떨었을 건만 독립해 나간 두 딸들의 빈자리가 크다. 간밤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남편의 코골이 소리마저 '나 건드리지마'로 귓가에 꽂힌다. 모닝커피 한 잔을 내려 홀로 부럼 깨기 의식에 들어간다.

제일 실해 보이는 피 땅콩을 집어 어금니에 대고 '우적' 그런데 이게 웬일! 한 피 안에 두 개 있어야 할 땅콩 알이 네 개나 들어있다. 빼곡히 들어찬 땅콩 알을 보는 순간, '거리두기 없이 모였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에 미치자 슬그머니 코로나 걱정이 고개를 든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무너진 일상이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얼마 전, 방역지침으로 인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세상을 등진 한 자영업자의 이야기가 뉴스를 탔다. 자신의 원룸 보증금을 빼서 직원들의 밀린 월급을 다 지급하고 떠났다는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자영업자들이 생존권을 내세우며 영업제한 철회를 주장할 때 진심으로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일단 내 일이 아니었고, 코로나 종식을 위해서 누군가는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3년간 운영해 온 가게를 지키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며 시대의 아픔에 앞서 인간의 도리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보다 힘들었을 순간에 직원들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고 했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감내해야 할 몫이라면 '당신들이'라는 속내로 살았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코로나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거세기만 하다. 설마 했던 최악의 상황이 현실이 되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휩쓸려 두려움과 체념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동시대의 아픔을 겪는 서로에게 격려와 응원의 힘이 필요한 때다. 더불어 삶의 곳곳에서 최소한의 도리와 감사의 삶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김애경 수필가
김애경 수필가

다시 보니 거리두기 없이 들어 차 보이던 땅콩 네 알이 어깨를 맞댄 동무처럼 정겹다. 덤이라 생각하며 오도독 깨물어 부럼을 깼다. 다름없이 고소한 맛이다. 부디 올 한 해는 몸의 부스럼도, 마음의 종기도 없이 잘 살아내기를 빌어본다. 부럼을 깨듯이 이기심과 두려움을 깨고 더불어 행복하고 고소한 인생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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