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반가운 빗소리다. 후드득 후드득. 얼마나 기다리던 단비인지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연녹색 생명을 움 틔울 산이 붉은 화마에 휩싸여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던가. 그렇게 사력을 다해 끄려던 산불이 다 진화되고, 앙다문 꽃봉오리도 팝콘 같이 터질 것이다.

과학 문명이 발전해 5G 시대를 열었어도 활활 타오르는 산불을 완전히 잡는 것은 하늘의 도우심이다. 이러할 때 우리는 하늘의 위력에 감사하면서 겸손해진다. 날이 가물어 자연 발화된 산불이 민가와 송이 군락지를 다 태워도, 먼 산 불구경하듯 실내 화단에 물을 주었다. 넓은 밭이나 산야의 생명들은 속수무책 물 기다림에 지쳐 발아도 제대로 못하고 스러질 것만 같을 때 반가운 비가 왔다. 농작물이 잘 크라고 비료를 주지만 하늘이 내리는 은총의 물 비료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하도 오랜만에 온 비라 우산도 쓰지 않고 사붓거리며 개나리 오동통한 겉껍질을 축이는 빗방울에 시선이 머문다. 새순을 내밀려 두런두런 거리는 새싹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빠져듦도 잠시 코로나 생각이 나서 황급히 발길을 되돌린다. 집에 오니 거울 속 비 맞은 아낙의 모습이 물에 빠진 생쥐 같다. 귀한 단비지만 어디에나 적당한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든다. 단비가 먹는 물로 확장 되어 끓인 물을 다시 끓여 먹지 말라는 말이 떠오른다. 같은 물을 여러 번 끓이면 산소 농도가 달라지고, 잠재적으로 위험한 물질들이 축적된다고 한다. 유해 가스뿐 아니라 비소, 질산염, 불소와 같은 유독 성분이 생겨날 수 있음이다. 불소가 뇌와 신경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입증한 연구도 많다고 한다. 칼슘처럼 원래는 인체에 유용한 미네랄 성분이 신장 결석을 유발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다시 끓인 물로 차를 탔을 때 예민한 사람은 맛이 다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차를 탈 때 아이들은 포트 안의 물을 꼭 버리고 새 물을 끓이는데 눈에 거슬렸다. 무엇이든 아껴야 한다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가 물 쓰듯 물을 쓰면 안 된다고 배운 고정관념이다. 꼰대 같은 짓을 했구나 싶어 뒤늦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조했다. "21세기 문맹은 쓰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요. 읽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다. 과거에는 그러했지만 앞으로는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 낡은 지식을 버리려 하지 않는 사람, 재 학습을 받지 않으려는 사람."이라고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명구이지 싶다.

찻잔을 들고 창밖을 보며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듣는다. 내려다 보이는 행인들의 노랑 빨강 우산이 피어나는 꽃송이 같다.

이 봄, 꽃봉오리 미소 짓게 하는 단비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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