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소설가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뭉그적이고 있는데 휴대폰이 들썩인다. 반가운 분이다. 아직 이불속임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고 목다심부터 한 후에 응답하는 목소리를 높은 음으로 잡고서 "야~" 했더니 "이렇게 백설이 하얗게 쌓이는데 뭐해요 얼른 나와요." 하면서 시간과 장소를 알린다. 아직 동살이 다 번지지도 않은 창문을 열어보니 백설이 제법 두껍게 깔렸다. 강아지처럼 뛰고 싶어졌다.

그는 언제나 이렇게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고마운 인연이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우리 좋은 인연들이 만나서 눈길을 헤집고 산길을 오르는 동안 누군가 소원을 빌며 하나 둘 쌓아올린 계곡의 돌탑에도 하얗게 하늘 솜이 쌓였다. 저 소원들이 이뤄지기를 기원하며 나도 오늘 함께한 인연들의 건강을 빌었다.

발가벗은 활엽수 가장이에 소복소복 앉은 하얀 눈과 상록수들이 고봉으로 한 쟁반씩 들고 있는 솜사탕이 대조적인 매력으로 빠져들게 한다. 먼 산의 몽환적인 풍광에 입을 다물지 못하다 보니 각연사다. 대웅전에서 고려태조 왕건의 스승이며 헤종, 정종, 광종에 이르기까지 왕사로 모셨다는 통일대사상 앞에서 모르고 있던 역사 한 토막 담고 나왔다. 비로전 석조 비로자나불 앞에서는 종교적인 숭배 보다 작품성으로 눈여겨보며 광배에 새겨진 불꽃무늬와 당초무늬, 아홉 화상불에 어울리게 대좌 또한 야단스럽지 않을 정도만 화려하다. 아마 평범하고 오밀조밀 오동통 귀엽기까지 한 불상과의 조화를 위한 노력인가보다. 불상의 나발과 육계가 차별 없이 펑퍼짐해서 더 평범해보였고 그래서 더 임의롭고 정이 갔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환상의 세상에 들어 온 기분으로 좋아했지만 눈구덩이 고갯길을 넘을 때는 운전하시는 선생님의 표정부터 살폈다. 얼마나 긴장이 될까만 다행히 긴장된 표정이 아니라 함께 즐거워 해주는 배려에 진정 고마웠다.

원풍리 마애불을 그냥 스쳐갈 리가 없지, 잠시 인증 샷을 하고 수옥폭포를 찾았다. 온통 하얀 백설세상 한가운데서 물안개를 피우며 떨어지는 폭포수를 보자 대중가요 한토막이 떠올랐다. 저 세월은 고장도 없느냐…. 폭포수도 엄동설한이지만 여전히 고장 없이 흐른다. 우리 좋은 인연들도 고장이 없기를 기도한다. 연세 드신 두 분 시인도 추운 겨울에 움츠리지 않고 천진스럽게 즐거운 표정에 시인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작은 세재, 지릅재를 넘으며 아직 안개를 덜 벗은 먼 산 설경은 말 그대로 몽환적인 설산이며 이국의 풍경 같아서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일행은 모두 말로 형용할 수가 없어 뱃구레서 올라온 저음으로 "야~!"를 거듭할 뿐이다. 월악산 등산로 초입을 지나 제천방향으로 오다가 그는 어느 아담한 휴게소 옥상으로 올라가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을 닮은 월악산 영봉도 놓치지 않고 한 컷 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충주로 넘어가 국제조정경기를 했던 충주호를 바라보고 있는 중원탑 앞에서 잠시 역사를 메모하고 용전리 입석마을의 고구려비까지 둘러보았다. 고구려비에 관해서는 따로 설명한 적이 있어서 그냥 넘긴다.

너무나 뜻밖에 보람된 하루를 엮었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했다. 내가 사람 복 하나는 잘 타고나서 참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소설가

십오여 년 전 문학공부를 시작했을 때 처음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참 조심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행복은 역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피어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동행하는 문인 선후배님들이라서 관광보다는 수준 높은 답사가 된 하루였다. 게다가 원로 시인님의 한마디, 한마디 하시는 말씀마다 삶의 밑거름을 주시니 더 좋은 날이 되었다. 종일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할 뻔했던 하루를 이렇게 값진 날로 엮어준 시인님께 고마운 마음과 축복을 기원하는 마음 엮어서 보낸다. 당신은 복 받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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