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사람이 내게 오는 건 우주가 오는 것이다, 그의 인격과 더불어 그의 삶 전체가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일상이 감사로 넘쳐나는 햇볕 따스한 날 우리 집에 함(函)이 들어왔다. 함진아비는 결혼 해 아들 낳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친구를 앞장세운다. 재앙과 액운을 태운다는 마른 오징어 가면을 쓰고 신랑 집에서 준비한 함을 메고 오는 것이다. 온 동네가 떠들썩하고 요란스럽게 "함 사세요.~"소리치는 신랑 친구들에게 신부 친구들의 애교작전이 펼쳐진다. 밀고 당기는 실랑이를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한 날이기도 하다. 시끌벅적 청사초롱 밝히던 이웃집에 함 들어오는 풍속을 요즘에는 여간해서 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딸과 사위는 대학 새내기 때 만나 4년 동안 C.C.C 사역을 함께 하던 동기동창이다. 친구는 친구일 뿐 덤덤하게 지내다 졸업 후 한 사람은 취업전선으로, 한 사람은 군대를 갔다. 몇 년 후 결혼식 하객으로 갔던 그 곳 동기들 뒤풀이에서 다시 만났다. 뒤늦게 가까이 있는 보석을 발견하고는 일곱 해의 끝자락에 친구에서 연인이 되기로 한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평행선이 하나의 끈으로 엮여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가는 서툰 걸음을 내 디뎠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어 잠시도 손을 뗄 수 없는 강력한 자석 같은 청춘. 매일매일 톡톡 튀는 예쁜 사랑을 만들어가는 젊은 그들의 사랑은 깨가 쏟아진다. 충청도에 사는 경주 김씨와 경상도에 사는 청주 한씨가 만난 인연의 끈이란 참으로 신묘막측(神妙莫測)했다

예비 신랑과 딸은 거실 테이블위에 함을 올려놓았다."지금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잘 살겠습니다."정성스레 준비한 함 속에는 안사돈의 깊은 안목과 사랑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나비와 목단 꽃이 새겨진 나전칠기 자개함을 열었다. 기러기 한 쌍. 금 거북이. 청실홍실. 다섯 가지 곡식(五穀)이 들어있는 오방주머니. 함께 사는 동안 사랑의 약속을 잘 지키고 최고의 명예와 신분, 장수를 누리길 바라는 애틋한 부모 마음까지....

우리나라 전통 오방색은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 이다. 다섯 가지 곡식은 쌀·보리·콩·조·기장인데, 오방주머니에 곡식을 넣으며 새 가정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같이 담은게다.

파란색주머니에 담긴 찹쌀은 찰떡같이 끈끈한 인내심을 갖고 백년해로 부부애를 기원한다. 나쁜 기운을 면하고 부정을 막는다는 빨강 주머니에는 붉은 팥이 들어있다. 마치 문설주 인방에 피를 발라 죽음의 사자를 비껴 간 유월절(踰越節) 의미와도 상통했다. 알고 보면 세계의 풍습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안에 담겨 있는 기도(祈禱)는 다른듯하지만 같다. 노란 주머니 속 콩은, 황금색 재물과 귀한 신분을 뜻하는 며느리의 고운 심성을 바란다. 흰색주머니 목화씨는 가문과 자손번성의 풍성함을 소망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검정주머니에는 절개와 순결을 상징하는 향나무 조각을 넣어, 장래가 잘되기를 기원한다. 청·홍색 비단 겹보에는 금 은 보화로도 바꿀 수 없는 혼서지가 들어있었다.

이경영 수필가<br>
이경영 수필가

무엇보다 시아버님 되실 사돈어른께서 청·홍 명주실을 이용해 엮은 납폐(納幣)의 예를 손수 붓글씨로 쓰셨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혼서지에 가문의 소개와 며느리를 자식으로 맞이하게 됨을 감사로 표현하시니 감동이었다. 전화기 너머로"며늘아 사랑한다."뚝뚝한 경상도 시아버님의 어려운 사랑고백은 인간미 넘치는 사랑 그 자체다. 함 파는 풍속이 사라져가는 아쉬움이 있다면 신랑이 직접 함을 지고 오는 간소함이 부담을 덜어주기도 한다. 함(函)진아비 막내사위 가정이 매 순간 사랑으로 가득하길 축복하며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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