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기후 변화가 세계적 관심사가 된지 오래 되었다. 그만큼 절실한 것도 없고 그만큼 간절한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대개 안이한 편이다.

기후 변화처럼 우리의 생명, 우리 자식들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영향 끼치고 중차대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대체 왜 이리 둔감하고 남의 나라 이야기려니 생각하는 편이 다분할까? 사람은 영리하면서도 막상 당하고나서야 후회하며 정신을 차리는 동물인 걸까?

45억년 전쯤 지구가 생겨난 이래로 대멸종이 지금까지 5번 지났고 기후 위기로 오는 대멸종이 6번째라는 말도 있다.

첫번째는 4억4500만년 전에 있었다는 고생대 오르도비스기 대멸종. 두번째는 3억7천만 년~3억6천만년 전의 고생대 데본기 말의 대멸종. 세번째는 2억5100만년 전 고생대 페름기 말의 대멸종. 네번째는 2억 5백만 년 전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말의 대멸종. 다섯번째는 6500만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의 대멸종이다.

인류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들이 있지만 진화론을 따르면 유인원까지 쳐서 대략 500만년~700만년 전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지구에 있었다는 5번의 대멸종은 모두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건들이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몸엔 아득한 날들의 기록들이 배여 있다. 가령 백화점에 들어섰을 때 남자와 여자의 태도는 다르다. 남자는 휘이 둘러보는 반면 여자는 바로 가까운 곳으로 걸어가 물건을 고른다. 남자의 그 행동은 수렵, 여자의 그것은 채취의 행동이 몸에 배여있기에 우러나온 것이라고 진화심리학에선 말한다.

기후 변화로 인한 치명적인 위험이 다가오는데도 인지의 확산, 실천이 따르지 못하는 데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 지점까지 나는 온 것이다.

인간이 생겨나 살아온 지금까지 인간은 대멸종에 대한 경험이 없다. 수렵, 채취, 가족의 죽음, 흑사병, 전쟁 등 무수한 경험들을 겪었지만 대멸종에 대한 경험은 없다. 경험한 것들은 인간의 몸에 배여 있어 위기시나 습관적으로 나올 수 있지만 경험한 바 없는 대멸종에 대해선 몸에서의 반응이 둔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제 6의 대멸종이 이전의 다섯번의 대멸종과 달리 인간에 의해 온다는 과학적 사실, 툰베리 등 활동가나 전문가들의 발언, 훌륭한 다큐 등 무수한 증거들이 있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 다섯 개의 대멸종 말고도 지구에 대멸종이 더 있다고 밝혀져 있다. 다섯번째인 중생대 백악기 말의 대멸종 이후에는 600만년~500만년 전 지중해 증발로 일어난 매시니안 사건 때 유럽과 북미를 비롯한 대멸종이 있다고 한다. 270만 년 전 남북 아메리카의 충돌로 남미 토착 포유류의 대멸종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들을 감안하면 인간의 초기 시절엔 대멸종과 오버랩되는 부분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각한 기후위기에 둔감한 이유로 내가 말한 경험 결여는 오류가 될 수도 있다. 현생 인류의 기원을 유인원 정도는 떠나 270만 년 전의 대멸종 이후로 본다면 내가 한 말이 설득력이 있을 수 있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주장이 틀린지 아닌지 증명이 싶진 않다. 그러나 인간은 가족이 물에 빠져도 물에 뛰어든다. 미래가 불안해 보험도 든다. 백년도 대개 못 살면서도 영생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많다. 가우디는 자기 삶에서 다 못 볼 건축물을 기획해 짓다가 죽었다. 현재나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대해서도 이렇듯 민감성을 지닌 사람들이 당연히 민감해야 할 기후 위기에 둔감한 이유 중에 만약 이것이 신빙성이 크다면 기후 위기에 대한 답보 상태에서 새로운 발걸음을 뗄 수 있지 않을까. 그 색다른 시작이 되진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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