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옥 수필가

지나가는 길손들이 대문을 열고 들어와 꽃구경을 하고 갈 만큼 예쁜 꽃들이 고향 집에는 참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보기 귀했던 백합, 튜울립을 비롯해 뒤꼍의 모란과 작약 꽃밭, 이른 봄 온 동네마저 환하게 만들어 주었던 몇 그루의 살구나무, 그 외 과실나무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꽃이 피고 지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니 그 속에서 꽃잎이 열리고 닫히며 조용히 진 자리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겠다. 목숨 있는 것들이 만들어내는 향기와 소리, 그것도 예쁜 모습을 가진 것들이 내뿜는 생명의 소리는 어쩌면 지금의 나의 청력을 키워 준 자양분이 아니었을까.

큰 감나무와 가장 가까이 있던, 언니들과 함께 썼던 우리들의 방에 누워 있으면 '똑~!' 하고 감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언니 들려? 하고 물으면,

무슨 소리? 하고 언니는 되묻기 일쑤였다.

감꽃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거나 이른 새벽 '똑~'하고 감꽃송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이 깨면 뒤뜰에 나가 감꽃을 주어 실에 꿰어 길게 꽃목걸이를 만들던 시절, 나는 듣는 것에 민감한 아이였다. 무궁화 꽃잎이 또르르 말려 저녁 무렵이면 '스륵' 떨어지는 소리도 내 귀엔 들렸고, 분꽃이 저물녘에 제 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았다.

이렇게 발달한 청력은 곧 나의 듣기의 힘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상대의 말을 눈 반짝이며 마주하고 귀 쫑긋 세워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 받아들여 주는 일, 그것이 나의 최대의 장점이라고 스스로 자신했었다.

그런데 나의 이 자부심이 무참히 깨져버린 일이 있었다.

몇 해 전 '스피치 리더쉽'이라는 강좌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강좌에서 듣기 능력을 실험해 본 적이 있었다. 강사의 말을 들으며 그대로 어떤 도형을 그려내는 일이었다. 한참의 말을 들으며 지시대로 따라 그리다가 마침내 강사의 말이 끝났을 때 내가 만들어낸 도형의 그림은 원본과는 차이가 많이나는 전혀 엉뚱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물론 공간 인지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유난히 수학적 도형의 개념에 익숙지 않은 나의 결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고 자위했지만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토록 자랑으로 여겼던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며 듣는 것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내 멋대로 이해하고 너의 말을 모두 이해한다는 거짓 표정을 짓는 일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우리 판소리 격언 중에 "귀명창 있고 명창 있다"고 했다. 소리를 제대로 음미하고 소리꾼 경지의 높고 낮음을 가늠해내는 귀, 곧 수준 높은 청중이 명창을 낳는 법이다. '일(一)고수 이(二)명창'이라는 말도 있다. 소리를 해석해 "얼쑤" 추임새 넣어가며 장단 맞추는 고수의 '귀의 힘'이 명창의 '입의 힘'보다 크다는 얘기다.

듣는 귀명창이나 고수는 없고 온통 떠들어대는 소리광대들만이 존재하는 이 소란한 소음의 시대에 상대의 말에 인내심을 갖고 마음과 눈까지 동원해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일, 이것이 어릴 적 내 청력을 키워 준, 자연이 내게 들려주는 '소리'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김영옥 수필가
김영옥 수필가

이제 나는 또다시 라일락 향기가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누군가 내게 건네는 소소한 이야기 한 토막도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듣기의 힘을 회복하리라.

새벽 산책길, 길가로 기어 나온 달팽이 한 마리를 풀숲으로 돌려보내며 그가 건네는 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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