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김성우 충북재활원장

0.73%라는 역대 최소 득표차로 출범된 새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특히 지역간, 세대간, 남녀간 그리고 소위 사회적 '계층'간 대립과 불목으로 분열된 한국사회를 어떤 방식으로 통합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과 우려가 높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중요한 초기 정부의 인사정책에서부터 범국민적 지지를 받는다 말하기 어려워 보인다. 부모의 지위와 경력이 곧 자녀의 대학진학과 사회진출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허탈함을 국민들은 다시금 느껴야만 했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 있자면 사회 지도층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국민의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에서 나오는 미담 사례가 더욱더 그리워진다. 높은 사회적 도덕성을 의미하는 이 단어의 어원은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있었던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문과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문 간의 '백년 전쟁'에서부터 유래된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의 한 도시인 '칼레'를 점령한다. 칼레 시민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항복 사절단을 왕에게 보낸다. 에드워드 3세 왕은 칼레 시민의 목숨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그동안의 저항에 책임을 지고 시민 중 6명을 교수형에 처하고자 한다. 칼레 시민들은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할지 서로 논의하였지만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때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티슈 드 생 피에르'라는 사람이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법률가 등의 귀족들이 사형수로 자청한다. 왕비의 간청을 통해 이들의 희생정신의 내용을 들은 왕은 감복하여 처형을 취소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시작은 사회 구성원 모두의 존엄성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만들어질 수 있다. 나의 생명과 한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이 소중하듯 내 이웃의 생명이 소중하고 그들의 존엄성 또한 보장받아야 한다. 또한, 내가 누리고 있는 권위와 명예 그리고 부의 축적까지도 나 스스로 만들었다는 교만한 생각이 아니라, 함께 사회를 만들어가는 구성원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을 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김성우 충북재활원장
김성우 충북재활원장

정치의 궁극적 목표는 정의의 실현이다. 정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불평등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루어질 수 있다. 정치인으로, 국무위원으로 또 고위직 공무원으로 임명되는 것은 이러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사리사욕과 자신의 속한 집단의 이익을 보호하고 특정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할 자격은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회의 지도층들이 자신에게 허락된 권한을 인지하고, 높은 사회적 도덕성과 책임감을 갖고 모범을 보일 때 국민대통합의 구심점을 비로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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