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성수 전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많지만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일 것이다. 역사의식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존재가치 의식이다.

역사의식이 있는 집단이 앞선 문화를 창조할 수 있고, 선진문화가 인간을 더 이성적이고,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인간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집단의 규모나 완력, 경제력과 일치하지 않는다.

세계를 호령하던 元나라나 지금의 중국 국민은 국력만큼 행복하지 않다. 역사의식이 중요한 이유이다.

역사란 인간의 존재 과정이다. 흔히 역사를 과거에 '있었던 事實'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미래에 '있어야 할 史實'에 더 가까운 것이다.

만약에 역사가 '있었던 事實'의 기록에 그친다면 '있어야 할'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事實과 史實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事實은 있었던 일이지만 史實은 事實을 인류 행복에 도움이 되도록 재해석하는 창조과정이다.

事實은 글자만 알면 기록할 수 있지만 史實은 엄정한 역사의식이 없이는 기록할 수 없다. 역사가 엄정(嚴正)을 잃으면 날조된 虛事(허사)이다.

국수주의나 패권주의에 의한 나치나 러시아의 세계전쟁 도발은 인류의 행복을 파괴하기 때문에 스스로는 불행한 事實임은 물론, 史實의 준엄한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그런데 통탄스럽게도 우리의 현대사에는 事實에 얽매여 史實을 잃어버리는 일이 많았다.

일제가 우리의 근대화에 공헌했다는 일부의 주장은 事實일지언정 史實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한 침탈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매국친일파가 청산되기는커녕 항일애국지사를 제거하고, 국정을 주도한 것은 불의가정의를 이긴 불행한 事實이었고, 있어서는 안 될 史實이었다. 지금이라도 이를 반성하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우리의 쓰라린 事實이 史實이 될 수 있다.

맹목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거나 아픈 상처를 건드려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생각한다면 역사의식, 즉 인간존재 가치의식이 결여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5.18이 일어난 지도 벌써 40년이 훌쩍 넘었다. 지금 60대 이전 세대에게는 그 事實마저도 분명치 않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事實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지향적인 역사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史實에 의한 해석과 평가 능력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은 분명치도 못한 事實에 얽매어 수십 년 동안 요란한 기념식을 치르면서도 정작 5.18에 대한 史實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5.18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 진행 과정, 양민 학살,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상 등이 중요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事實에 가까운 일들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논란 중에서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인 그 史實에 대해서는 아직도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5.18처럼 엄청난 비극을 고작 事實의 정리로 끝낸다면 그 희생자에 대한 도리도 아닐 것이다.

자신의 희생으로 이 나라의 정의와 역사를 바로 세우자고 염원했던 지사들이었다면 고작 국가유공자 지정이나 보상, 배상으로 만족할 리 없다.

그런데 한쪽에서는 事實에 치우쳐 희생자의 억울함에 대한 과도한 배상을 요구하고, 일각에서는 과잉보상이라 빈축하며 대립각을 세운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래서야 5.18의 고귀한 정신이 한낱 지역감정으로 폄하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나 있었던, 있을 수 있는 우리의 역사였으므로 지역감정으로 치부하는 것은 反역사적이다.

목숨보다 귀한 자식을 잃고서도 배상보다는 재발방지를 호소하는 평범한 시민들을 얼마든지 목도하지 않는가? 이 소시민들의 간절한 호소가 진정한 역사의식이요, 인간존재가치 의식일 것이다.

5.18의 정신을 기리는 것은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일이다.

만약에 5.18을 지역감정에 의한 돌발적 충동행위로 간주하거나 정치적인 통치행위로 정당화한다면 우리에게 양심과 정의와 미래는 없다.

이를 미래의 史實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책임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국가적인 정책과 국민적인 각성이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김성수 전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김성수 전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우리는 뼈저린 우리의 소중한 경험과 역사를 허투루 흘려보내는 일이 너무 많다.

국민이 스스로 알아서 역사를 기록할 수 없다면 정부 지도층에서나마 史實을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찌 5.18 뿐이겠는가? 제주도 4.3학살, 6.25 양민학살, 4대강 사업, 새만금 공사, 세월호 참사와 같은 통한의 事實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려들지 말고,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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