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방송을 자주 본다. 청년들이 경험과 견문도 많지 않을 텐데 어찌 그리 의견이 분명한지 놀랍다. 내 주변사람들도 의견을 내세울 때면, 내 숨이 턱 막힌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동안 무얼 했나 돌아본다. 뭔가 꾸준히, 남들 눈엔 열심히 하는 듯했을 텐데 알맹이가 없어 허전하다.

내 자체가 흐릿해 그런가보다. 못하는 것들은 웬만하면 유전 탓으로 돌리고 싶다. 그래도 최 씨에 곱슬머리 옥니박이라고 생각하면 무척 민망하다. 얕은 지식에 신념이 없어 다른 이들 의견 앞에 꼬리를 내리니 안타깝다. 이게 아닌데 싶어도 반박하지 못하니 꿀 먹은 벙어리일 수밖에….

목소리 큰 이들이 많으니 제 의견 없는 이 하나 있다한들 흉 될 게 없다. 우리 사회가 원체 역동적이니 의견도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그 중에 무색무취(無色無臭) 하나 있다한들 무에 문제이랴.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 눈이 멎은 장면이 충격적이다. 수만은 되어 보이는 서양인들이 한국가수의 노래에 비명을 지르며 열광한다. 가만히 들어보니 영어가 섞이긴 했지만 가사도 우리말이다.

세계무대를 누비는 한국인의 저력을 느낀다. 오천년 그 질긴 힘이 어디 가겠는가? 변방이라 생각하고 주눅 들어 드러내지 못했던 선대(先代)와 달리 당당히 펼쳐 보이니 세계의 눈과 귀가 우리 것에 주목하는 것일 게다. 인터넷 혁명으로 누구나 발언권을 가질 수 있으니 인류의 시야가 넓어진 게다. 목소리 분명한 이들이 살아남고 공연장 탐조등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에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남을까?

내 생각의 바탕은 바닥이요 변두리다. 굳이 이기고 살아남으려 하지 않는다. 크고 대단한 나무보다 이름 모를 풀들이 더 많고 알려진 이들보다 무명의 사람들이 다수다. 단단한 바닥, 견고한 변두리가 있어 그 위에 높은 건물이 서고 중심지가 형성될 수 있는 게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함께 있지 않던가? 복(福)과 화(禍)는 동전의 양면이요, 영육 분리가 죽음이며 궁극에는 성속(聖俗)이 다르지 않다.

화려한 저택도 사용하는 곳은 빈 공간이요, 잘난 가지가 먼저 꺾이고 경국지색의 끝이 좋았던 적이 있는가? 한두 걸음 물러나 보면 큰 차이 없고 인생도 유구한 우주 역사에서 보면 순간이다. 오히려 무지한 인간들이 푸른 지구별에 못할 일들을 늘어놓는 건 아닐까? 역사는 탐욕과 어리석음의 기록이니, 힘을 기반으로 세력 확장에서 벗어나지 못해 전쟁과 수탈이 그치지 않았다.

탐욕의 밑바닥은 내 것에의 집착이요, 그 이유는 안락함에 있다. 조금 불편하게, 남의 눈 의식 않고 자기 신념대로 살아가며 가난에서 조금 더 배울 수는 없을까? 타인의 비난에 담담할 수 있는 맷집과 그들의 평가에 덤덤할 배짱이 있다면 세상살이가 조금은 더 편해지지 않을까?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꿈같은 이야기다. 어느덧 내 삶에 퇴행(退行)적 모습이 보인다. 진취적이며 적극적 행동 대신 뒷걸음질 치며 생각만 많아지고 행동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렇다 할 재주 없어 남 앞에 서는 일이 드물다는 게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애매모호함이다. 조금은 민망하고 서글프지만 어쩔 것인가? 그렇게 생겨먹은걸…, 스스로 한탄과 안도, 원망과 감사, 좌절과 기대를 오가며 그렇게 또 하루의 눈금을 메꾸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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