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서울이라는 명칭은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 서벌에서 유래되었는데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수도로 건설되어 한양, 한성으로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경성으로 개칭되었지만 1945년 8.15 해방 이후 지금의 서울로 다시 바뀌었다.

다음백과에 '서울'을 검색하면 이렇게 나온다. 백제의 첫수도 한성 내지 위례성이 과연 어디인가는 의견이 분분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 한강 유역이라고 하지만 완벽한 건 아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발견 무렵 즈음 관리 소홀도 문제지만 이렇다 할 증거들을 제시하진 않는다. 다양한 견해들로 세분되지만 크게 퉁쳐서 한강 유역이 백제의 첫수도라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왜 서울을 말할 때 백제의 첫수도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지 않을까? 가까운 중국만 해도 시안은 당의 수도이고 북경은 명, 청의 수도임이 확실하다. 조선의 수도 한양인 서울에 백제의 첫수도인 위례성 내지 한성이 포함되는가 아닌가. 서울이 한성이라고 하면서 서울을 이야기할 때 백제의 첫수도로서의 한성은 왜 배제 내지 소극적으로 다루고 조선의 한양만 강조하는가 백제 한성을 포함하면 서울은 이천 년이 넘는 문화도시가 되며 세계적으로도 그런 예가 드물다. 이 귀한 가치를 왜 드러내지 않는가?

경주의 경우 천년 수도라고 말하며 세계적으로도 자랑거리이다. 경주엔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능이라는 오릉부터 시작해서 능들이 무척 많고 왕릉이라고 확실한 증거로서 밝혀진 것들도 있다. 경주 곳곳에 보물과 유적지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서울에 백제 초기의 왕릉 즉 온조왕릉이나 다루왕릉, 또 문주왕 웅진 천도 이전의 왕들의 무덤이 밝혀진 것이 있는가.

백제 건국이 기원전 18년이다. 웅진 천도가 475년이다. 한성 백제의 한성이라는 서울 기간이 무려 오백년 남짓이다. 오백년 조선에 근접하는 기간이다. 그 긴 기간 동안에 백제왕릉으로서 확실한 것이 하나도 없다. 백제 전체를 통해 무령왕릉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왕릉이다. 한성 내지 위례성이라는 서울에 백제왕릉이 한 개도 없다면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 파헤쳐져서 없는 것인가? 어딘가 있는데도 발굴이 되지 않는 것인가? 이유야 무엇이든간에 경주와 달리 한성 백제의 한성이라고 말하는 서울엔 백제의 초기 유물이 몹시 빈약한 편이다.

객관적 사태가 이럴진대 의아해서 추적할만한 지점들이 생긴다. 백제의 한성을 포함하면 이천 년 수도로서 세계적으로 귀한 가치가 분명한데 그것에 왜 소홀했을까.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과 관심이 정치권이나 소위 역사를 다룬다는 역사학계에서도 적다고 말한다면 이에 대한 충분한 반론이 가능한가?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굳이 이천 년 수도를 강조하지 않음은 한성 백제의 수도인 한성 내지 위례성이 지금의 서울이라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음인가. 증거도 충분치 않을뿐더러 한성 내지 위례성이 지금의 서울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주장들도 나름의 증거와 설득력을 지니고 운운하는 실태이다. 한성 내지 위례성이 서울이라는 자신감이 근거 있게 있다면 한성 내지 위례성으로서 달리 주장되는 장소들을 아울러 심도 깊은 공론장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서울의 이천년 전 모습이 후련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철학적 질문을 해본 것이다. 관계자들이 성의 있는 답변이 있고 공론장에서 깊은 이야기들이 모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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