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동맹휴교 주도… 일제 폭거 온몸으로 맞선 학생운동가

이철하 선생 수형시절

〔중부매일 이병인 기자〕애국지사 이철하 선생은 전주이씨 덕천군 후손으로, 1909년 12월 12일 부친 이건성과 모친 청주한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특히 이철하 선생은 현재의 공주고등학교 전신인 공주고등보통학교가 민족항일기였던 1922년에 충남에서 처음 공립 고등학교로 설립됐을 때 1924년에 입학하여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당시의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하나의 학교로 합쳐서 6년제로 운영되던 인문계 고등학교였으므로 오늘날 학제로 보면 이철하 선생이 고등학교 1학년 때라고 할 수 있다.

이철하 선생 젊은시절

1927년에 공개석상에서 조선인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장에게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던 일로 심한 구타와 퇴학을 당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에는 220명 학생들이 동참하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최초 동맹휴교를 불러옴으로써 공주의 청년학생들의 애국혼을 불러일으킨 민족항일운동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이 분의 인생과 항일운동사를 조명해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편집자
 

이철하 선생의 생애

이철하 선생도 바로 그 피난지에서 1909년 12월 12일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921년에 피난지 생활을 청산하고 신기리 위의 편지에 의하면 신기리 394번지로 이사했다고 한다.

집안에서 한학교육을 받은 이철하 선생은 1922년 공주공립보통학교(현재 공주중동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학해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924년 봄에 명문 공립학교인 공주고등보통학교(현재 공주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철하 선생 부인

이철하 선생은 이 때(1924년) 민영덕(여흥민씨)의 딸(1908년 생)과 혼인해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은설이며, 차남은 은석이다.

1934년생인 장남 이은설은 사회통계학박사로 미국에서 생활하다가 2018년 4월에 사망했는데 생존 시에 휴스턴 텍사스대학 공중보건학교 통계 및 인구통계학 교수를 역임했다.

미망인 양산이씨와의 사이에서 딸 주혜와 아들 동주를 두었다. 차남은 아들과 딸을 두었다.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항일투쟁

공주고등보통학교(현재 공주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이철하 선생은 책읽기와 토론을 즐겼으나 학과 공부보다는 조국과 민족의 암담한 현실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공주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 이철하 선생은 통학을 하면서 길가의 이정표나 담벼락에 항일구호("일제는 물러가라", "조선은 영원하다")를 직접 적거나 여러 가지 내용을 담은 대자보를 제작해 게시하는 등 소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한 번도 발각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26년 12월 25일에 일황 다이쇼가 죽자 공주고등보통학교에서도 엄숙한 추도식이 열렸는데 학교 측은 학생들에게 검은색 추모 완장을 착용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철하 선생을 비롯한 조선인 학생들은 조선식 상복을 입고 참석해 사실상 반일 집단시위를 벌였다.

주동학생들은 끌려가 무자비하게 구타당했고 이후부터 일본인 교사들은 조선인 학생들을 더욱 차별하고 멸시하자 민족의식이 강했던 이철하 선생이 교장에게 당당하게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1927년 6월 26일 이철하 선생은 선생의 부친이 보는 앞에서 일본인 교장이 이철하 선생을 심하게 구타한 뒤 퇴학처분을 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비분강개한 이철하 선생의 동료(4학년) 학생들은 1927년 7월 2일(토요일) 아침부터 등교를 거부함과 동시에 같은 날 오후 1시께 참가학생(주로 조선인 4학년생) 전원의 서명이 담긴 진정서를 학교 측에 전달하였다.

▷생도(학생)를 퇴학시킬 때 너무 경솔하게 하지 말 것 ▷교장은 반성할 것(이유 생략) ▷마츠이 선생을 사직시킬 것 ▷指田선생의 생도에 대한 차별적 처사를 고칠 것 ▷교사(학교 건물) 및 이화학실 건축을 조속히 실행할 것 ▷6개조에 대해 원만한 해결을 못할 때는 사임할 것 ▷단 해결통지는 7월 13일 내에 있기를 요함 ▷위 기일까지 일동은 휴교함.

이때 공주고등보통학교 맹휴에 참가한 학생은 이철하 선생과 동급생인 4학년생 50명과 1년 밑인 3학년생 80여명, 2학년생 90여명 등 모두 220명 이상이 동맹 맹휴에 참가했다.

조선인을 공개석상에서 수시로 무시하는 일본인 교장에게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던 이철하 선생의 항일운동으로 촉발된 당시의 공주고등보통학교 맹휴사건은 곧바로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7년 7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반성문 보낸 학생을 구타 출학(黜學)/ 조선사람을 항상 무시한다는 공조고보 교장의 처사(處事)'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이 날부터 7월 14일까지 동아일보는 무려 6건의 관련 기사를 게재했다.


 

'ㄱ당 사건'과 서대문형무소 투옥

공주고등보통학교 맹휴사건 이후 한동안 칩거생활을 하던 이철하 선생은 1927년 말경 서울로 가서 잠시 동안 배재고보를 다녔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1928년 봄학기에 중동고보로 학적을 옮겼다.

특히 이철하 선생은 중동고보로 학적을 옮긴 직후부터 합법단체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가입한 뒤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구치소 수형기록

이철하 선생이 1928년 11월 경 이른바 'ㄱ당 사건'으로 경찰에 검거되었을 때, 같이 검거된 동료들 가운데 가장 높은 실형을 선고받은 것도 이러한 남다른 활동력 때문이었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경성(지금의 서울)에 진출한 지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철하 선생이 어떠한 활동을 전개하였는가를 보여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여러 활동 내용 중 '각 학교의 동맹휴학을 선동하는 활동' 등이 들어 있었고, 이철하 선생이 활동기간은 짧았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이유인지 모르지만, 'ㄱ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0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4년의 실형 선고를 받았다.
 

항일운동 재조명, 독립훈장 애국장 추서

이철하 선생은 1936년 7월 21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별세하면서 오랫동안 세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가 1992년에 이철하 선생을 애국지사로 조명하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은설 교수가 서울에 있는 동안 신용하 교수가 서대문형무소에 있었던 문서 중에서 이철하 선생의 형무소 수형 기록과 생존 사진을 어렵게 구했다.

이때부터 이은설 교수는 신용하 교수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철하 선생에 관한 많은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고, 신용하 교수는 이철하 선생을 애국자상에 지원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런 노력 끝에 1993년 8월 15일 드디어 이철하 선생이 국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이철하 선생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게 되자 1995년 10월 11일에 계룡면 내흥리 산 11번지에 있었던 선생의 유골을 수습해 그 다음 날인 10월 12일에 국립대전현충원의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공주고등학교 장학재단에 재산 기탁

이철하 선생의 조카(이은재)의 주선과 권고에 따라 이철하 선생의 차남(이은석)과 장남인 이은설 교수의 유가족들은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이철하 선생이 다녔던 공주고등학교에 재산을 기증하게 됐다..

증여계약서

이렇게 좋은 뜻에서 이철하 선생 별세 후 선생의 묘소가 있었던 충남 공주시 계룡면 내흥리 산 11의 임야 10만1천256m²(3만630평)을 지난 2018년 12월 24일 당시 소유자였던 이철하선생의 차남(이은석)과 장남(이은설)의 미망인(이종만), 손녀(이주혜), 손자(이동주)가 함께 공주고등학교 장학재단(당시 이사 임재관)에 조건 없이 증여를 했다.

이렇게 하여 이철하 선생의 애국혼이 다시금 그의 모교인 공주고등학교를 통해 새롭게 숨 쉬게 된 것이다.
 

[인터뷰] 이일주 공주문화원장


이철하 선생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지 27년이라는 짧은 인생을 살았다. 비록 이철하 선생은 항일운동을 하다가 너무 일찍 별세하였지만, 남겨진 아들(이은설, 이은석)과 손녀(이주혜)의 노력으로 독립투사인 선생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하는 또 새로운 공적을 쌓았다.

공주사람들이 해야 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이 해야 할 노력을 가족들이 해 낸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부친과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불과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다녔던 부친과 조부의 모교인 공주고등학교의 발전을 지원하는 재단법인인 공주고등학교장학재단에 쾌척한 사실은 이철하 선생의 애국혼이 여전히 살아 숨 쉬게 한 남은 가족들의 숭고한 뜻이 담긴 것이라고 본다.

이철하 선생의 조카인 이은재씨의 회고에 따르면, 이철하 선생은 두 아들의 이름을 일본어로 개명하라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고, 미망인 고 민금순 여사는 자손들을 보기 위해 미국에 가고 올 때 일본을 경유하는 비행기를 이용했는데, 일본땅을 밟지 않겠다고 하여 경유지 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을 통해 볼 때 이철하 선생의 숭고한 항일 투쟁의지를 그동안 충분히 재조명 하지 못했던 부끄러움을 현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주혜가 남긴 글을 통해 한 가족의 역사가 곧 한 지역, 나아가서는 한 국가의 역사가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인식하게 되었다.

멀리 미국에서 살면서도 만 61세가 될 때 까지 자신의 부친의 인생과 항일운동사를 조명하기 위해 진력했던 이철하 선생의 장남(이은설)과 손녀(이주혜)의 노력이 비극적이었던 '일제식민기'를 열혈 항일 투쟁을 통한 '민족항일기'로 바꾸는 큰일을 해 냈음을 강조하고 싶다.

이와 같은 노력을 한 가정, 한 문중의 역사로 묻어두지 않고, 지역사회와 국가에 널리 선양하는 노력을 하는 공주시에 큰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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