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오계자 수필가

몇 년 전 일기다. 6월 14일 일요일

하늘은 화창, 마음은 끄느름한 날이다.

봉사시간 끝나자마자 누가 날 찾는 소리, 휴대폰을 열었다. 친구 K의 목소리에 먹구름이 밀도가 높게 끼었다. 즉시 달려가 신세타령을 들어주고 있었다. 답답하다. 나보다 더 답답하게 살아 온 친구.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고, 나처럼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자고 했지만 그 친구는 엄두도 못 낸다. 너무 오랜 세월을 묻어 둔 용기가 삭아버렸다.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오늘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줬다. 이 대리석 틈새에서 정말로 힘들게 살면서도 예쁜 꽃을 피운 인동초를 보면, 환경도, 나이도 탓할 수 없을 것 같아서다.

삶이란 내가 만든 길을 내가 걷는 것. 누구를 탓하랴.

"내년이면 더 늦잖아 내년보다는 지금이 더 빠르지." 이 나이에 뭘 하느냐는 친구에게 우선 운전면허부터 도전하라고 손을 잡았다. 자기는 겁이 많아서 안 된단다. 저렇게 여린 식물도 대리석 틈새를 찾는데 사람이 어찌 그리도 용기가 없냐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만 친구도 나도 눈시울을 적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지은 만큼 누리는데 그 친구 여태 자식들 미래만을 위해 죽을 힘 다해 살아 왔다. 자식의 미래가 곧 나의 미래라는 일념으로.

그런데 자식의 미래는 주인이 따로 있더란다. 가꾸어 꽃피우고 열매 맺으면 함께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놈들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자꾸만 손사래를 친단다. 자식 일이라 속에 묻고 말 못하던 둑이 터졌다. 그만 펑펑 울어댄다. 실컷 울게 뒀다.

"저렇게 제 식구 비위 맞추며 살지만 맘만은 편치는 못할 내 새끼가 불쌍혀"

와중에도 자식 생각해서 또 한바탕 운다. 아들은 엄마 심정 알지만 안식구 눈치가 두려운 것이란다. 엄마들이 왜 하나만 알고 둘 생각을 않는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자식의 맘을 편하게 해주고 싶으면 엄마가 씩씩하게 살아야 된다고, 그래야 자식 맘도 편할 것이라고 설득 했지만 이미 너무 굳어 있다. 아무렴, 저 여린 인동초가 대리석 틈새를 후비고 나오는 것 보다는 사람이 내 길 찾는 것이 더 쉽지 않겠냐고 우겼다. 정신력만 찾으면 무엇인들 못하랴. 이내가 내리고 어둠이 살 속까지 스며들 때, 내일 나랑 같이 수영장과 운전학원부터 등록하기로 약속하고 일어섰다. 하지만 내일의 그 친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여전히 어깨가 축 처져있을 것이라는 걸 경험해본 터라 안다.

참으로 답답하다. 어떤 길이 진정 자식을 위하는 길인지 그 길이 바로 나 자신의 길이라는 걸 왜 모를까. 자식들 웬만큼 뒷바라지가 되어 거는 오십대 후반부터는 바로 부모님들은 자식보다 본인 즉 자신의 노후를 뒷바라지해야 된다. 나를 위함이 곧 자식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오계자 수필가
오계자 수필가

밤이 깊었지만 컴퓨터를 열어 차곡차곡 준비하고 쌓아둔 프로젝트 내 노후의 삶을 열어본다. 다행이다. 대금을 꺼내 한곡 불어본다. 이것이 자신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그래도 그 친구보다 조금 더 씩씩하다는 것이 다행이다.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탈인 내 욕구를 반의반만 뚝 떼어 그 친구 주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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