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류시호 시인·수필가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선 시대 불교 문화전시회에 갔다. 박물관에 가면 문화재나 유물 중 불교 미술품을 많이 본다. 그 이유는 불교가 우리 역사 문화에 끼친 영향이 많았고, 우리의 삶에도 오랜 기간 정착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도입된 초기는 스님이 수행에 전념하도록 노동이나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보살 사상이 나오면서 바뀌었다. 승려가 보살이 되려면 유용한 기술을 습득하고 익혀서 중생에게 베풀라고 제시했다.

스님 장인의 손은 수행하는 손이자 무언가를 만드는 손이다. 나무, 돌, 비단, 삼베와 같은 여러 재료가 어우러져 불상이나 불화 같은 성물(聖物)을 완성시키는 것은 승려의 손끝에서 시작된다. 수행을 하며 도달한 이상세계는 일반 미술과 다르다. 스님 장인은 전문적인 제작기술을 지닌 출가승을 말하고 조선 시대에는 여러 분야의 장인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신앙의 대상인 부처를 형상화하는 조각승(彫刻僧)과 화승(?僧)이 중심이 되었다.

이번 전시의 백미는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예천 용문사의 보물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과 그 뒤쪽에 배치된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이다. 이 보물이 특별한 것은 아미타여레좌상을 중심으로 아미타여레설법상이 부조로 제작되어 예술로 뛰어난 자태를 뽐낸다. 이 작품은 숙종 10년 단응(端應)을 비롯한 조각승 아홉 명이 제작했다고 한다. 400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생생히 다가오고, 이번 전시를 위해 처음으로 사찰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동안 완성된 불화만 보다가 불화의 밑그림들을 만났다. 통도사 팔상도는 화승 수십 명이 모여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를 여덟 장면에 나누어 그린 대작으로 밑그림 초본과 완성본 2가지를 전시했다. 참여한 화승은 수십 명이 넘지만 작품에 기록된 화승 명단은 두훈, 포관, 유성만 있다. 그리고 대형 불사가 있을 때 어떻게 분업했는지 볼 수 있었다.

한편, 경상도 상주 남장사 불사를 위해, 서울, 경기와 전라도, 인근 문경 대승사에서 화승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에 활동하던 장인들이 모여 협업하며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냈다. 스님들은 각자 소임이 있는데, 법대로 바르게 진행되는지 확인하는 증명(證明), 사찰 운영 비용마련을 하는 화주와 그외 내왕, 송주, 화원, 지전, 별좌가 있다. 그리고 공양할 음식을 만드는 공사, 나무를 하고 불을 지피는 부목, 불사 전체를 총괄하는 도감(都監) 등으로 나누었다.

조선 시대에 파악된 조각승은 1천여 명이고, 화승은 2천 4백여 명에 이른다. 숭유억불의 조선 시대 이처럼 많은 스님이 활약하였으니 조선 시대가 불교미술의 르네상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전시작품들이 모두 승려 장인들인데, 간송미술관 소장 작품 중 단원 김홍도가 그린 '서방 정토를 오르는 스님 뒷모습'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류시호 시인·수필가
류시호 시인·수필가

어깨에 해진 바랑을 짊어지고 이곳저곳 고을을 걷던 이들이 있다. 조선 시대 불상을 만들고 불화를 그리던 스님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함께 이룬 공덕이 모든 이에게 닿기를 기원했다. 화가와 조각가를 꿈꾸었던 이들은 불상과 불화를 손끝으로 펼쳐낸 예술가였다. 우리의 예술혼에는 위와 같은 선조들의 장인 정신이 있었기에, 이런 기술과 예술혼으로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우리 모두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얼을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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