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나인문 대전세종본부장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그는 땟거리가 없어 기근에 시달리자 결국 도둑이 됐다. 관아 창고에 쌓아둔 곡식을 실어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줬다. 홍길동은 스스로 도적이 된 게 아니라, 국가가 그를 도적으로 만든 셈이다.

정부가 30조 원 규모의 기금을 통해 채무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자영업자·소상공인 25만 명의 빚을 최대 90%까지 탕감해 주기로 하면서 논란이 뜨겁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덜어줘야 한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적다. 하지만 '빚은 버티면 해결된다'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확산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청년 빚투(빚내서 투자)족'에게 1년 이자 감면 등의 혜택을 주기로 하면서 빚투를 하지 못한 청년층의 반발이 거세다. '투자의 자기책임 원칙'이 훼손되고, 무모한 투자에 유혹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날 수 있다는 이유다.

정부의 곳간이 이렇게 막 퍼줘도 되는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다수 백성들은 알량한 세경 몇 푼 받기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데, 뭐 하러 힘들게 일하느냐는 자조가 퍼지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들의 기를 살려주고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짊어지려는 정부 방침이 '흥청망청'이 될지, '흥성흥성'(興盛興盛)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움직이는 건 생존의 법칙이다. 꼿꼿하게 서서 바람을 견디다가는 몸뚱이가 꺾여 금세 생을 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갈대의 흔들거림도 일종의 노동이다. 비바람에 흔들리고 때로는 강풍에 꺾이기도 하지만 흔들흔들 열심히 노동을 하며 삶을 지탱하고 있는 셈이다. 일을 하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꾀를 부리지도 않는다. 나무도 저절로 크지 않는다. 눈비를 맞으며 생명력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숨을 내쉬고 물을 빨아들이며 노동을 한다.

2014년 개봉해 1천426만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국제시장'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격변의 시대를 몸으로 휘감았던 우리 시대 아버지인 '덕수'의 모습을 통해 홀로 어깨에 짊어진 가장의 무게를 절절하게 느끼게 한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는 주인공 '덕수'는 '자기 인생에서 정작 자기는 빠져있는' 아버지들의 한(恨)이다.

"아부지 예~ 이만하면 잘 살았지 예. 그런데 저 진짜 힘들었거든 예~."

나인문 대전세종본부장
나인문 대전세종본부장

덕수의 독백은 창백하다.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오늘은 덕수 같은 백성들의 눈물로 쌓아올린 결과다. 초년고생(初年苦生)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알고 보면 그래서 헛소리다. 고생을 해서 이루는 성취보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게 백배 낫기 때문이다. 열심히만 한다고 다 되지도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하얀 테이블보를 깔고 은쟁반에 기름진 스테이크를 즐기는 자들이, 어찌 흙냄새와 흙의 바탕을 알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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