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오십 원만 빌려주시겠어요?" 동네 편의점 데크의 의자에 앉아 메로나 하나 사먹고 있는데 육십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쭈삣쭈삣 다가오더니 말했다. 진짜 오랫만에 들어보는 말이다. 천원짜리 지폐가 있다면 이유 불문하고 한 장 정도 드리고 싶은데 지갑에 5만원 지폐 한 장과 카드밖에 없는 나는 방법이 없었다. 십년 정도 전이라면 편의점에 들어가 간단한 뭐라도 5만원 지폐를 내고 사서 거스름돈 받아 일이천 원도 드리고 혹 빵, 우유도 사서 덤으로?드렸을지도 모른다. 세상 물정에 대해 알면서도 모른척 속아주는 정서도 내가 약해졌나보다. "없어요". 그 말로 대신했다. 행색이 궁핍해 보이진 않았다. 옷도 괜찮은 편이고 눈빛도 살아 있었다. 이 사소한 해프닝은 나를 짧은 멍때림 후에 야릇한 곳으로 불쑥 이끌었다.

우선 빌려달라는 말은 달라는 말에서 영악하게 진화된 말이다. 빌려달라는 말에 구걸, 거짓말, 속임수가 포함됨으로써 그 말은 진짜 빌려달라는 것, 가짜로 빌려달라는 것으로 분화된다.

세상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누군가 뭔가를 빌려달라고 할 때 잠깐의 먹먹한 불편함이 거의 무시되는 분위기로 우리 사회의 정서가 변했다. 게다가 오십원만 빌려주세요, 이 말은 거의 사어의 속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사회의 깊은 곳을 건드리고 사람들이 망각의 단계에 이른듯한 곳을 푹 찌르는 느낌이 있다.

오십원. 그 말은 아주 잘 계산된 말일 개연성이 크다. 그리운 시절의 어느 정서로 훅 끌고 간다. 듣는 사람이 넉넉한 사람이라는 기분을 들게 한다. 대개 오십원 짜리 동전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백 원짜리 동전도 거의 들고 다니지 않으며 오백원 짜리 동전도 점점 그러한 추세이다. 선심이 다소 몽롱한 가운데 일어나는 사람이라면 천원을 주는 게 거의 상식일 것이다 "천 원만 빌려주세요" 이렇게 말했다면 천원을 받는 확률이 지금 시대에선 몇 프로쯤 될까? 5 프로? 3 프로? 제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꾸며 공개적인 질문을 한다면 이 시대의 풍속도가 나올지 모른다. "오십 원만 빌려주세요" 이렇게 말할 경우 천 원 받을 확률이 거의 두 세배 높아질 것 같다. 그만큼 영악한 말이다. 천원 정도를 기대한 상태에서 상대의 마음을 순간 무장 해제시키며 묘하게 마비시킴으로써 소정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십원은 미끼이다. 그 미끼를 이용해 천원 정도를 공짜로 얻으려는 것이다. 그 영악한 말이 천박 자본주의 정글인 우리나라에서 조금은 통한다 함은 순수, 인정 같은 가치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다. 오십 원만 빌려달라는 사람의 뇌 안에 든 오십 원은 얼마이며 선뜻 천 원을 내 주는 사람의 가슴에서 해석된 오십 원은 얼마인가?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다르게 볼 수도 있다. 삶이 망가지고 피폐한 상태에서 생존 본능에 대한 지혜 정도만이 남아 저 말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을 저렇게 구걸하며 떠돌게 하면 안된다. 정부에서 사회안정망을 확장시켜 그 범주 안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야 한다. 확률도 희박한 천 원 정도에 삶을 저당잡히게 하지 않고 월 단위로 적정 금액을 무상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냥 속임수에 익숙하고 남의 주머니 터는 중독에 빠져 사는 사람인 경우도 저 말을 쓸 수 있다. 이 몇가지만 보더라도 저 문장은 해석의 놀라운 다양성 안에 놓여 있다. 인간적인 내음이 소멸된듯한 사회에서 저 말은 좀 과장한다면 오 헨리의 단편 <마지막 잎새> 같은 느낌도 슬쩍 든다. 그만큼 문학이나 예술로 승화될 씨앗이라는 말도 된다. 오십 원은 얼마인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