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밥 먹고 쉬고 웃고… 둥구나무 쉼터 마실 '삶의 낙'

마을 입구에 위치한 느티나무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에서 천안 방향으로 접어들어 옥산산단을 지나치면 호죽리 마을이 나온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느티나무가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 아래 작은 정자 끝에 처마를 덧댄 쉼터에서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들은 여기를 둥구나무 쉼터라 부른다. 살랑살랑 부채바람 너머로 보이는 초록이 더위를 쫓아낸다.

이곳은 호죽리 속에 있는 강촌마을이다. 진주 강씨(晉州姜氏)가 처음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어서 붙은 이름이다.

강촌마을 전경

'강촌웃말'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12대 후손인 강규동(92) 어르신이 논농사, 밭농사 지으며 살고 있다. 규동 씨가 작업복 차림으로 미니 삼륜차를 끌고 둥구나무 쉼터에 다다른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지청구 아닌 지청구를 퍼붓는다. "아이구, 노인네가 뭔 일을 그리 많이 한대유. 더운데 일 좀 줄이셔." 아직도 목소리가 짱짱하신 규동 씨는 부러 큰 소리로 말한다. "놀면 뭐햐, 일거리 없으면 방에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 그리 살고 싶진 않네. 자식에게 의지 안 하고 죽을 때까지 일하면서 살 겨." 오래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새마을지도자를 9년이나 봤다는, 그래서 좁은 마을 길 넓히느라 동네 사람들과 돌멩이 주워다 날랐다는, 그때는 이장보다 새마을지도자가 더 잘나갔다는, 혈기 팔팔했던 시절을 소설처럼 줄줄 풀어낸다.

옥산면 강촌마을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느티나무 아래 작은 정자 끝에 처마를 덧댄 쉼터를 '동구나무 쉼터' 락 부른다. 이 동구나무 쉼터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다. 

강촌마을엔 20여 가구가 있는데 그중 열 가구는 혼자 사는 분들이라고 한다. 서너 분이 단짝이 되어 둥구나무 쉼터를 만들었다. 농사일하다 쉴 때는 이곳에서 드러눕기도 하고 보리밥을 해서 같이 먹기도 한다. 한두 사람이 먼저 자리 잡고 있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합류한다. 모처럼 처갓집을 찾아 강촌마을로 들어오는 젊은이가 둥구나무 쉼터에 모여 있는 어르신들을 보고는 차에서 내린다.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한 보따리 건네주는 손이 이쁘기만 하다. "저 윗집 누구네 사위래." 어르신들은 아이스크림보다 더 달콤한 말로 그 사위를 칭찬한다.

둥구나무 쉼터 단짝 중에 환한 웃음이 돋보이는 효순(83) 씨가 제일 큰언니 격이다. 강촌마을에서 50년 넘게 살고 있다. 외손녀가 유명한 배구선수라고 자랑, 아들이 자주 밥을 사준다며 자랑, 미소가 점점 커진다. "40대쯤에는 농사일도 엄청 많이 하고 동네일도 많이 했지. 일고여덟 명이 몰려다니며 그릇 장사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밤중까지 놀곤 했는데 힘든 줄도 몰랐어. 그때가 제일 좋았던 거 같아. 사람들이 우릴 보고 '얼러리패'라고 놀리기도 했다니까." 말끝에 나를 보고 진심을 담아 말해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야, 많이 놀러 다녀. 늙으면 추억으로 먹고 사는겨."

효순 씨랑 쉼터를 쓸고 닦고 하는 선희(71) 씨는 아직도 가끔 '새닥'소리를 듣는다. 마을에 선희 씨보다 젊은 사람이 몇 안 되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는 열 살 위 언니들이 어려웠지만 느티나무와 함께 나이 들면서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 평생을 일만 한 것 같아 아쉽긴 하지만 앞으로 좋은 일만 생기면 좋겠다며 희망을 품는다.

강촌마을이 친정인 미경(69) 씨는 혼자 계신 어머니 집에 들렀다가 둥구나무 쉼터에 마실 왔다. 열 살도 안 되었을 때 동네 아줌마들이 미경 씨에게 예쁘게 화장해주면서 장난을 쳤다고 한다. 빨간 '뻰니'를 바르고 그 생경한 느낌 때문에 입술을 오물오물했다고 말해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가끔 강촌마을에 계신 친정아버지를 찾으면 "네가 오니까 밥이 넘어가는구나. 네가 반찬이다."하면서 딸을 반겼다고 한다.

이장댁 앞 꽃
이장댁 앞 꽃

둥구나무 쉼터에서 세월을 거꾸로 돌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건너편 집에 사는 베트남 새댁네 두 아들이 자전거를 끌고 큰길로 나온다. 어르신들이 이구동성으로 베트남 새댁을 칭찬하기 시작한다. 81세 시어머니를 벌써 5년째 병간호하고 있으며 초등학생 아들 둘을 잘 키우면서, 근처 공장에 일까지 다닌다고 한다. 강촌마을 어르신들은 착하고 부지런한 베트남 새댁에게 "똥도 아깝다."며 응원을 보낸다.

명자씨와 오토바이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커다란 4륜 오토바이를 타고 씩씩한 명자(69) 씨가 들어서자 둥구나무 쉼터에는 다시 이야기꽃이 만발한다. 이장 댁 마당에 피어난 색색 꽃처럼 강촌마을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한여름 더위는 어데 갔나 아무도 모른다. /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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