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경영 수필가

가을 햇살에 비치는 엄마의 그림자는 너무 야위었다. 반쪽을 잃어버린 날개없는 새가 된 슬픔을 안으로 삭이며 살고 계신다. 친정집 거실 탁자 위에는 전시회장을 방불케할 정도로 크고 작은 사진 액자들로 가득하다. 엄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그것들을 매 순간마다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신다. 기쁘고 즐거웠던 때론 슬프고도 암울했던 기억의 조각들이 담겨있기 때문일게다. 살아온 삶과 남겨놓은 것들을 추억하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것일수록 그 머무름이 짧은 것이기에 더욱 그립고 아쉽게 느껴지는가 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사진 속 그들과 만나 세월의 그리움을 풀어내는 그것이 엄마의 오늘을 살게하는 힘이다.

아이들이 평균 셋 이상인 집이 많았던 베이비붐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달려가던 곳이 있었다. 부모님은 온종일 가게 일에 바쁘셨기에 우리 사남매 놀이터는 교회 앞마당이었다. 그 곳에서 동네 언니, 오빠, 동생들 모두 어울렁더울렁 함께 놀았다. 흰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햇님 방긋 솟아오르면, 손에 손잡고 찾아 가던 곳이다. 북치고 장구치며 친구들을 모으면 조기 엮듯 줄줄이 따라 가던 즐거운 놀이터다. 놀면서 배우는 노래와 율동, 그림과 글짓기, 만들기까지 신나는 축제 그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내 유년의 징검다리가 된 놀이터는 엄마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외할머니로부터 친정엄마, 나, 그리고 딸, 손주들까지 5대째 믿음의 젖줄을 이어가게 했으니 말이다. 그 시절 함께 자란 놀이터의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언니 동생 누나 오빠로 지낸다.

구십 넘은 할머니와 팔십 오 세된 할머니가 서로 보고 싶어, 그리워 한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두 분 모두 몸이 불편하여 타인의 도움없이는 맘껏 다닐 수가 없는 형편이다. 서울과 청주에 사시는 두 할머니 상봉을 위해 시간을 내 모시러 온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업만으로도 바쁜중에 마음을 다해 어른 섬기는 일이 쉽지 않은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보고 싶고, 생각나고, 그리운 사람들은 그리워만 해서는 안된다. 살아생전 만나게 해 드려야 한다. 또 기회가 오면 좋고,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도리를 다 하고 싶다."며 먼 길 마다않고 기꺼이 와 주겠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은 엄마의 목소리는 마냥 흥분되었다. 가을 옷도 한 벌 사야 하고 염색, 드라이도 해야하니 빨리 엄마 집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얼굴에 찍어 바를 것도 필요하고 조그만 선물도 준비해 달라는 이것저것 주문이 많았다. 놀이터 동생의 따듯한 마음과 섬김으로 1박2일을 보내고 온 엄마는 너무나 행복해 했다. 얼마 만큼의 세월을 풀어냈을까. 지난 추억속에 들어가 잠시 멈춘 젊은 날의 엄마와 오래 된 친구는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까.

이경영 수필가
이경영 수필가

행복, 사랑, 기쁨, 슬픔…. 감정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소소한 일상의 그런 특별한 날을 많이 선물 해 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일진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나를 키운 엄마는 분명 사랑이었는 데 나는 왜 의무와 도리로 할까. 나를 있게 한 엄마인데, 자식과 부모에게 하는 것이 영 다르니 어찌할까? 혹여라도 엄마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엄마가 내게 주었던 것처럼 행복한 것들로 가득 채워 주어야겠다.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팡이 집고 조금이라도 걸을수 있을 때 가야한다. 두런두런 옛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때, 엄마와 함께하는 나들이를 준비해야겠다. 언제 어느 때든 나를 품어주는 따듯한 엄마의 그늘이 사라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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