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색·거침없는 붓질… 일상 속 감정 캔버스에 담다

[중부매일 정구철 기자] 캔맥주만한 아크릴 물감통을 거꾸로 들어 캔버스에 물감을 잔뜩 짜놓은 뒤 커다란 커다란 붓으로 이리저리 거침없이 빈 공간을 채워간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구도가 잘 잡힌 정물은 그려져 있지 않고 그저 보색을 이룬 붉은색과 녹색의 굵은 선들이 위 아래로 어지럽게 교차돼 있다.

마치 붓이 가는대로 아무렇게나 낙서한 것처럼 보이지만 캔버스를 응시하는 작가의 눈은 예사롭지 않다.

이마에는 산고의 고통을 담은 듯한 땀까지 맺혀있다

캔버스에는 무질서하고 강렬한 붓 자국만 무성하게 남았을 뿐인데 어느새 완성된 그림 앞에 서면 뭔가 모를 경건함마저 느끼게 된다.

이계련(59) 작가는 다양한 색채와 형체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그림에 담아내는 여류 추상화 작가다.
 

시골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계련 작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용돈이 생기면 연필과 노트를 사서 어머니가 빨래하는 모습 등을 그리곤 했다.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화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질문했던 그는 마침내 머릿속에 그렸던 꿈을 이루게 됐다.

이 작가는 창원대학교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전공을 살려 실크와 한지에 먹과 동양화 채색물감으로 한국화를 그리던 그는 한동안 천의 매력에 빠져 3년 정도 천작업을 하기도 했다.

원래 구상적인 화풍을 보였지만 수년 전부터 비구상의 매력에 빠지면서 집중하기 시작해 추상화 작가로 변신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한 번쯤은 추상화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는 것처럼 이 작가도 추상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일찍 추상화 작가로 변신할 거라고는 그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작가가 추상화 작가로 변신을 하게 된 데는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색채에 대한 갈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추상화를 그리게 되면서 서로 다른 색상을 머금은 붓질과 붓질의 교차에서 이뤄지는 색의 조화를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희열과 황홀감을 느낀다.

그는 일상에서 느낀 감정이나 각종 사물에서 받은 영감들을 붓질로 표현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손과 붓이 가는대로 대충 칠한 것처럼 보여질 수 있지만 붓질 하나 하나에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고된 작업이다.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는 그로서는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그림을 그리려다 보니 하루에 단 한차례 붓질만 하고 끝낸 경우도 허다하다.

이 작가의 그림에는 마치 민낯과도 같은 그의 삶의 조각들과 영혼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계련 작가는 "내 욕구의 출발점은 이른 아침 어머니가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놓은 빈 마당에서였다. 특히 어머니가 쓸어놓은 비어있는 듯한 정갈한 마당의 고즈넉한 포용력에 매료돼 무언가 그려놓던 그 한모퉁이였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빗자루질과 그의 붓질이 교차되면서 비로소 'Serendipity'(우연하게 마주치는 뜻밖의 행운)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실제 붓 대신 빗자루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작가의 그림은 오히려 남성 작가의 작품보다 더 강렬하고 힘이 넘친다.

극도의 절제 속에서 강약이 조화된 붓질은 역동감과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독특하고 신선한 화풍으로 화단으로부터 주목을 받아온 그는 오래 전부터 한국화랑협회가 글로벌 미술시장을 겨냥해 주관하는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와 인연을 맺었다.

KIAF는 미술시장의 활성화와 미술 대중화를 위해 한국화랑협회가 2002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국제 미술전람회다.

화랑이 직접 열정적이고 신선한 작가들을 선택해 미술애호가들에게 우수한 작품 감상 기회를 제공하고 컬렉터들에게 작품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있다.

또 국내 작가들에게는 세계 미술시장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화가들에게는 KIAF 참여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있다.

올해 KIAF는 지난 달 2일부터 6일까지 코엑스에서 세계 3대 아트페어인 프리즈(Frieze)와 공동으로 개최됐다.

프리즈 서울에는 전세계 110개 화랑, KIAF에는 164개 화랑이 참여해 아시아 최대 규모로 열렸다.

이계련 작가는 올해로 9년째 KIAF에 참여했다.

특히 올해 열린 KIAF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대형 화랑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미술시장의 변화 추세에 맞춰 그의 작품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최근들어 미술작품 구매자들 가운데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이 크게 늘고 있다"며 "미술작품을 투자 개념으로 보거나 자기만의 공간을 꾸미려는 젊은층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트페어에서 너무 좋은 작품들을 많이 만나면서 화가가 안됐더라면 차라리 좋은 미술작품들을 직접 구입하는 컬렉터가 됐으면 어떨까 하는 욕심도 갖게 된다"며 "그런 면에서 젊은 컬렉터들이 부럽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앙화단 뿐 아니라,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중원미술가협회와 한국미술협회 충주지부, 여성미술가회 회원으로 지역 작가들과 교류하면서 전시회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고있다.

이 작가는 지난달 21일부터 30일까지 대구 예송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8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KIAF를 비롯해 화랑미술제, 싱가폴 글로벌 아트페어 등 19회의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또 한일미술교류전과 한중미술교류회전, 탑크로키전 등 100여 회가 넘는 단체전에 참여했다.

모든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며 살고 있는 그는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계련 작가는 "작품활동을 시험공부 하듯이 치열하게 할 필요는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한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며 "앞으로 정말 좋은 추상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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