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두 번째 주자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세 번째 주자 가을이 마지막 주자 겨울에 바통을 넘겨주었다. 겨울이 달리기 시작한다. 가을은 아직도 힘이 남아 겨울과 함께 달리며 겨울에 힘을 보태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찬기를 느끼지만, 화사한 단풍은 그 자태를 잃지 않고 있다. 바람에 추락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겠다.

이럴 때면 어떤 이는 괜스레 센티(sentimental) 해지고 깊은 우수(憂愁)에 젖는다. 세상 고민 혼자 다 하는 양 개폼을 잡는다는 말이다. 다른 이는 어디선가 물씬 풍기는 책의 향기에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른바 서권향(書卷香)에 정신이 쏠린다. 상큼한 종이의 냄새는 물론 책 물성(物性)이 뿜어내는 행복감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언제 산 책인지 잘 모르지만, 적지 않게 손때가 묻은 책 한 권을 책장에서 꺼내 든다. 얼른 후루룩 책장을 넘겨 본다. 과거에 본 흔적이 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느낌이 좋아 선 채로 중간 페이지를 열고 읽기 시작한다. 읽다 보니 과거 책 여백에 승두문자(蠅頭文字:파리 대가리만 한 글자로 아주 작은 글씨를 의미)로 달아놓은 주석도 읽는다. "아하 당시 내가 책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구나." 돋보기로 봐야 하는 불편이 있지만 괘념치 않는다. 이런 느낌의 토대 위에 새로운 느낌을 보태 독서의 깊이를 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책장이 아닌 머릿속에 있어야 함을 느낀다.

순간 타임머신을 타고 아주 먼 과거로 여행한다. 시공간을 초월한다. 조선 정조 때다. 청나라 건륭제 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청나라에 갔던 연암 박지원을 만난다. 비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하자 벌어진 도박판을 싹 쓸어버린 일, 야간에 외출 금지지만 '뒷간에 간다.'며 외출해 밤새워 놀다 온 일 등등 120여 년 전 타국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였던 박지원을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보았다.

이처럼 책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언제, 어디라도 데려다준다. 비용도 값싸고 장소와 시간을 구애받지 않는다. 누구든 언제 어디서라도 책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지독한 탐독가였던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라(Pascal Quignard)는 독서의 최대 장점이 시공간의 초월성이라고 했다. "나는 원래 한 명의 독자이다. 내게는 평생의 열정인 독서가 '마법의 양탄자(Magic carpet)'여서 내게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매일 글을 쓰지 않지만, 매일 책을 읽는다. 어떤 것도 내게 독서를 포기하게 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독서는 출애급(Exodus)."라 했다. 독서는 끊임없이 현재에서 벗어남이며 자신이 그은 지식의 경계를 허물어 지식의 반경을 넓히는 일이라는 얘기다. 사실 정보와 지식을 얻고 확장하는 데는 이른바 가성비를 따지자면 독서만 한 것이 없다. "독서는 이 세상과 어긋나며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하는 일이다.-중략- 독서는 사회와 시간의 사각지대에서 살아가기. 이 세계의 모퉁이에서 살아가기, 자신 밖으로 떨어져 나가기. -중략- 죽은 자들과 더불어 사고하는 기쁨이다." 그의 말이다.

'마법의 양탄자'는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가능하게 한다. 독서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미지의 세계로 향한 문을 여는 열쇠다. 이탈리아 기자이자 작가였던 에밀리오 살가리는 "독서는 여행 가방과 씨름하지 않고 가는 여행."이라 했다.

많은 사람이 4대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베이컨의 주장은 독서 기피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식의 바다에 빠져 보자. 가방 메고 산으로 가지 말고 책 속으로 깊은 여행을 떠나자. 최종 목적지로 가는 길과 방법은 미리 정하지 말자.

김동우 논설위원
김동우 논설위원

박지원은 "한 선비가 책을 읽으면 은택이 온 세상에 미치고 공훈이 만세에 드리워진다(一士讀書, 澤及四海, 功垂萬世)."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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