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오늘은 12월 26일. 1년의 360번째 날이며 한 해가 저물기 5일 전이다. 달력 날짜가 검은색이어서 분명 공휴일이 아니다. 평범해 보이는 26일이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26일에 얽힌 사연은 로마 교황청이 유럽을 지배하던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야기 발생지는 영국이다. 26일은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다. 이날 영주들은 가족과 선물을 주고받고 성찬의 음식을 나눠 먹으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등 파티를 성대하게 즐겼다. 유럽인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니 성탄절 행사가 얼마나 성대하게 치러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영주의 성탄 축하연에는 농노들의 노고가 담겨있었다. 농노와 하인들은 며칠 전부터 영주의 집에서 영주를 위한 선물 포장과 음식 준비 등으로 분주해야만 했다. 그 일의 강도는 농사 못지않아 불만과 고통을 수반했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불만이 있어도 감내해야만 했다.

당시 유럽의 통치 제도가 봉건주의, 이른바 농노제였다. 사회 신분은 크게 토지 소유자 영주와 그 토지에 예속돼 부역, 공납 등 제공하는 농노로 나뉘었다. 영주는 지배계급이고, 농노는 피지배계급이었다. 농노는 신분과 영주의 토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속박 인이었다.

영주는 성탄절 파티를 준비한 농노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할 방법을 찾았다. 농노에게 굳이 이러하지 않아도 되지만 말이다. 가톨릭 국가에서 12월 26일은 성 스테파노의 축일이다. 이날 영주나 귀족은 남은 음식과 각종 선물이나 물건들을 빈민에게 나눠줬다. 이런 관습에 착안해 영주들은 농노들을 쉬도록 했다.

농노들은 영주 못지않게 먹고 마시며 하루를 즐겼다. 영주들은 26일을 'Boxing Day'로 불렀다. 'Boxing'은 '상자에 물건 넣기'라는 뜻이다. 성탄절 파티가 끝나면 영주가 농노에게 옷, 곡물, 생활 도구 등을 상자(box)에 담아 주었다. 여기서 'Boxing day'가 유래됐다. 현재 영연방 국가에서는 아직도 성탄절 익일이 공휴일이다. 봉건주의가 사라진 지금 농노에게 선물 주는 일은 없다. 대신 성탄절 선물을 배달하는 우체부 등에게 선물 주는 날이다.

2022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이때쯤이면 사람이건 조직이건 국가이건 과거 성찰과 미래 설계의 시간을 갖는다. 단 우리 정치조직은 제외다. 자성도 없고, 설계도 없다. 작금의 정치는 국민과 국가가 아닌 패거리를 위함이다. 다수 정치인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당리당략적, 사적으로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점에서다. 정작 국가와 국민을 위해선 사용을 꺼리고 있다. 이렇다 보니 우리 정치에는 국민이 없다. 단지 정치인들만 있을 뿐이다. 권력을 제공한 국민 위에 올라서 국민을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권력 행사가 일정 기간 법적으로 보장됐다는 이유로 도마 위 생선을 요리하는 칼질처럼 말이다.

돈을 빌리면 원금은 나중에 상환하더라도 이자는 꼬박꼬박 갚아야 하듯 권력을 위임받았으면 그 권력을 적절히 활용해 국가 기강 확립은 물론 국민통합에 이바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바지는커녕 우리 정치에는 소모적 언쟁, 볼썽사나운 실력행사, 흑백논리, 이성을 무시하는 팬덤 정치, 내로남불, 지역감정 악화 등 퇴치할 일이 태산만큼이나 산적해 있다. 이럼에도 정치인들은 직시 아닌 사시 눈을 뜨고 있다. 프레임이 왜곡돼 권력 행사가 부적절하다는 얘기다.

농노의 생살여탈권을 쥘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영주도 농노를 위해 특별 공휴일을 제정했다. 그러하지 않아도 농노는 할 말이 없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정치인들! 위임받은 권력이 국민과 국가를 난도질하는 무기가 되고 있지 않나를 곰곰이 생각해 봐라. 새해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무언가 해 봐라. 채권자인 국민에게 채무의 일정량을 꾸준히 상환하는 모습을 보여라. 채무 상환은 삶의 질과 국격을 높이는 일이다.

김동우 논설위원
김동우 논설위원

정치인들이여! 신년(新年)의 '新'이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새로운 물건을 만든다.'라는 뜻처럼 신년[새해]에는 정치력을 갈고 닦아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정치, 새로운 정치[新政治]를 실현해 보라. 이것만이 당신들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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