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우 칼럼] 김동우 논설위원

제도권 정치인은 무얼 먹고 살까? 국민의 소유인 '표(票)' 아니면 그 표를 통해 차입한 '권력'이다. 맞는 말이지만, 이보다 우선순위가 있다. '환상(幻像:illusion)'이다. 환상을 먹고 아예 그것에 젖어 산다. '환상'은 '허상(虛像)이 실상(實像)으로 보이는 환각 현상'이다. 정치인은 이 환상에서 자의든 타의든 벗어나기 쉽지 않다. 어찌 보면 헛것에 매달려 정치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정치인이 마약에 취하지도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닌데 환상에 젖어 있다니? 이유는 뭘까? 우리 정치사가 첨예한 집단이기주의에서 비롯한 대립, 그것도 '극한 대립의 정치'의 궤적을 그리는 유전인자 때문이 아닐까?

역사상 국회가 여야 극한 대립 없이 순탄한 일이 몇 날 며칠이었던가? 같은 사안을 놓고 여는 이러하고, 야는 저러하기 일쑤다. 하나는 거짓인 셈이다. 시비를 엄격히 가리지 않는 고집불통의 정치다. 타협, 협상의 실종 사태가 비일비재하다. 사안에 대한 판단기준이 오로지 집단(소속 정당) 논리이기 때문이다. 집단 논리에 최면이 걸린 상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급기야 투표를 통한 쪽수 대결로 끝난다. 아무리 투표가 민주주의 발달을 보여주는 기초이자 척도라 해도 쪽수 밀어붙이기는 투표 의미를 퇴색시키는 천박한 행위다. 왜 정치인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명철하고 객관적 사유와 실천을 그르치는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의 주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일루지오(illusio)'에서 말이다. '일루지오'는 그가 '환상'이란 뜻인 'illusion'을 변용해 쓴 말이다. 일루지오는 개별적 믿음이 아닌 사회적(집단적)으로 구성되어 공유된 집단 신념의 총체다. 하지만 그 집단 구성원이 아닌 외부 사람에게는 한 낫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일루지오는 특정한 장(field:집단이나 조직)에 속한 구성원만 실상으로 믿는 공유된 환상인 셈이다. 그렇다고 이데올로기로 치부할 수 없다. '신성은 신성에 대한 감각이 있는 자에게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유 있는 환상(wellfounded illusion)'이기 때문이다. 일루지오는 집단적 억견(臆見:doxa)의 상태로 집단적 기만을 유발하기도 한다.

일루지오는 분명 외부인이 보기에는 허상인데 구성원들이 그것을 따르는 이유는 뭘까? '상징폭력 때문이다. 일루지오의 존재가치는 상징폭력에 있다.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집단적 기만으로 구성원들에게 그 존재가치를 인정하도록 가하는 외압이다. 인정하지 않으면 그 집단에서 탈퇴하거나 불이익을 받는다.

요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이 소속 정당의 굴레에 안주하며 일루지오에 사로잡혀 상징폭력을 당한다. 당리당략이라는 그들의 대의명분이 바로 일루지오다. 그 당략은 상대 당의 구성원들이 보았을 때 대의명분이 없다. 실상이 아닌 허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 마찬가지다.

최근 이재명 체포동의안 표결을 놓고 국민의힘과 정의당은 체포동의안 찬성을 당론으로 정했다. 이는 일루지오이자 상징폭력이다. 허상을 만들어 그것을 실상으로 믿게 압력을 가한다는 점에서다.

민주당의 작태는 적나라한 일루지오와 상징폭력이다. '체포동의안 부결'을 당론으로 정해 표결 전 집단퇴장을 강제하자는 주류 의원들의 움직임, 이탈표 사태와 관련해 당의 '단일대오(單一隊伍:하나로 똘똘 뭉친다는 뜻으로 일사불란의 단합력 과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자는 원내대표의 주장, 개딸들의 이탈표, 이른바 '수박(푸른색 겉과 붉은색 속이 다른 수박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변절자로 반,비이재명계 지칭) 색출 등이 일루지오의 전형이자 상징폭력이다.

김동우 논설위원
김동우 논설위원

정당의 일루지오와 상징폭력은 경쟁 집단과 경계 지우고 구별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지나치면 통약(通約)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 정치는 퇴보하고 민생은 저 멀리 달아난다. 정치의 장(場)이 아닌 추악한 이전투구의 장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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