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내음 맡으며 백마강길 따라 만나는 '역사의 흔적'

편집자

도보여행은 자전거나 자동차 따위의 탈것을 타지 않고 걸어서 하는 여행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도시인 부여군이 차별화된 관광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펼치고 있는 다양한 테마관광 사업 중에 '백마강을 따라 여행'(2월 15일 자 보도)'수학여행'(3월 8일 자 보도) '산성을 돌아니며'(3월 22일 자 보도) '세계문화도시 부여를가다Ⅰ' (4월10일 보도) 에 이어 부여군 도보여행 코스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부여 도보여행 코스
부여 도보여행 코스

○ 백마강길 코스(24km,소요시간:10시간)

- 위치 : 충남 부여군 부여읍, 규암면 일원

▶백마강길은 백마강을 둘레로 하는 탐방로로서 찬란했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부소산의 북쪽 편을 감고 도는 백마강은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 앞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km 정도에 이르는 금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백마강길은 금강의 자연 수변공간을 활용하여 조성된 탐방로로서 녹색성장의 원동력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부소산성을 시작으로 하는 탐방길을 걷다보면 백제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문화재들을 접할 수 있어 마치 나도 그 옛날의 백제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백마강길을 거닐며 강에 얽힌 문헌이나 전설, 시가 담긴 석재시비를 감상하면서 백제의 흥망을 묵묵히 지켜본 백마강처럼 우리도 찬란했던 백제를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백마강길은 탐방의 발걸음을 멈출 때마다 옛 백제의 고도인 부여와 백마강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좋은 길이다.

▷ 왕흥사지길

왕흥사는 부소산 서북쪽 백마강 건너편 울성산성 산록의 남향대지에 위치하였고 1934년에 '왕흥(王興)'이란 글씨가 새겨진 암키와가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흥사지는 강가에 있었으며 채색으로 장식함이 장엄하고 화려하였는데, 왕이 늘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라고 한다. 백제 법왕이 창건하여 백제 무왕이 완공하였으니 35년에 걸친 대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화유적 발굴조사 결과 목탑지, 금당지를 비롯하여 동?서회랑 및 동·서건물지, 강당지 및 서편부속건물지 등과 절터 외곽에서 백제, 고려시대 기와가마터가 확인되었다.

2007년에는 발굴조사 중 사리공 내부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호, 청동사리합의 3중구조로 안치된 사리기가 출토되었다. 청동사리합 동체에는 "577년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탑(또는 사찰)을 세우고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 丁酉年二月十五日, 百濟昌王, 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葬時, 神化爲三' 는 29자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 사리함은 금, 은, 동 한 세트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의 미학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부산길

부소산 서쪽 백마강 건너편에 우뚝 선 부산을 탐방하는 곳으로서 고도는 약 106m이며 부여 시가지를 비롯하여 백마강 상?하류를 용이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대재각 암벽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로 새겼다는 비각이 있고 부산길을 따라 마을로 내려와서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부산서원을 만날 수 있다.

부산  전경
부산 전경

또한 백강 이경여 선생이 중국 명나라 사신 때 가져와서 심었다는 매화나무는 그 옛날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교류를 알려주기라도 하듯 500여년의 향기를 품고 있다.

특히, 부산은 충북 청주골에서 떠내려 왔다는 신기한 전설을 가지고 있다. 서기 538년 성왕께서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자 곰나루 물속에 살던 용들은 자기들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노하여 비가 오도록 심술을 부렸다. 백제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려지고 억수같은 비가 석 달 동안 내리자 사비성 주변은 온통 물바다로 변했다. 이때 백마강 상류 청주골에 살던 왕족에 속한 성주가 숭배해 온 집 앞의 산이 빗물에 떠내려 가버렸다. 밤새 떠내려 오던 산은 새벽녘에 이르러서 왕성을 만드는 역사가 한창이던 사비성에 다다랐다. 이때 사비성 호암리에 살던 호녀라 불리는 목소리 큰 여인이 아침에 일어나 둥둥 떠내려 오는 산을 보고 놀라 큰소리로 "산이 떠내려 온다"라고 외치자 그 소리에 놀라 잠을 자고 있던 산신이 깨어 산이 지금의 자리에 멈춰 섰다고 한다. 이때부터 부산(浮山)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금성산[일산]과 오산[오석산]과 의형제를 맺어 백성으로부터 삼산이라 숭앙받았다고 한다.

▷희망숲길

부산길을 내려와 진변리 마을의 정취를 느끼며 걷다 보면 희망의 숲길에 이르게 된다. 이 길은 녹색성장 동력의 활력을 알리기 위한 금강 살리기 사업과 연계하여 조성된 수변공간이며 2011. 4. 7. 식목행사 때 온 군민이 나무심기 행사에 참여했다. 이날 행사는 지역주민, 고향을 떠나 있는 출향인, 출향기업, 기관단체, 공무원 등이 600여명이 자율적으로 참여하였고 나무의 종류도 부여군에 정해진 수목 2천주(은행나무, 이팝나무, 청단풍, 산철쭉 등)를 자발적으로 구입하여 식재하였다. 또한, 부대행사로 행사 참여자들이 가족, 친구, 연인 등에게 희망, 추억,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 봉투에 담아서 매설 후 20년 후에 개봉하는 타입캡슐 봉인식도 개최되었다. 이 희망의 숲은 금빛 물결을 휘감으며 흐르는 백마강에 걸맞은 수려한 생태공간을 만들어 후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취지로 조성하였으며 찬란했던 옛 백제의 문화를 꽃 피우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다.

▷선화공원길

규암의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 때 양주 목사가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수북정이라 명명하였다. 수북정이 세워진 바위산의 명칭은 엿바위라 한다. 강 쪽에 돌출한 암벽에 쓰여 진 '자온대(自溫臺)'라는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필적으로 알려져 있다. 자온대는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기 위하여 왕래할 때 망배하거나 휴식했던 장소로 전해져 왔고, 임금이 도착하면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는 데서 자온대라고 일컬었으며 현재는 신하들이 임금이 도착하기 전 불을 지펴 바위를 따뜻하게 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정자 아래로 맑게 흐르는 백마강 위에는 수상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유람선이 한가로이 오가고 있다. 수북정에서 부여로는 백제교를 통해서 건너 올 수 있는데, 교량길이가 길다보니 이 다리위에는 휴게공간이 조성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풍요로운 이벤트가 가득하다. 백마강의 넘실대는 물결을 감상하면서 선화공원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부여가 낳은 대표적인 민족시인 신동엽의 시비를 맞이하는데 이 곳에서 신동엽 시인의 '산에 언덕에'를 읊으며 자연을 노래해 보는 건 어떨까 한다. 관련 유적으로 시인이 태어난 부여읍 동남리에 생가, 문학관이 있으며, 묘소는 부여읍 능산리 백제왕릉 앞산에 자리해 있다.

수북정  전경
수북정 전경

또한, 선화공원에는 백제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사실에 감사를 표하고자 일본 불교신도들이 1972년 백마강변 숲속에 세운 불교전래사은비가 있다. 발원자는 일본 불교도 전중지학(田中智學), 건립자는 일본불교 전래사은사업회이며, 전일본불교회가 협찬하여 세워졌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52년 10월 성왕의 명에 의하여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가 금동불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가지고 가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한다.

▷궁남지길

신동엽시비에서 제방을 따라 군수리 마을을 경유하여 궁남지를 돌아볼 수 있는 탐방로이다. 백제궁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하여 궁남지란 이름이 붙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무왕 35년에 궁의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나 되는곳에서 물을 끌어 들여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한가운데에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궁남지는 634년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정원으로 연못 가운데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정자까지 나무다리가 놓여 있다. 백제는 삼국가운데 정원기술이 가장 뛰어나 노자공이라는 백제 사람은 일본으로 건너가 황궁의 정원을 꾸며 아스카시대의 정원사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계절마다 색다른 느낌을 주는 궁남지에서는 연꽃과 야생화가 만발한 7월이면 서동연꽃축제가 열린다. 약 12만평 규모로 조성된 연꽃단지에는 희귀 연꽃 오가하스연, 빅토리아연, 기시연을 비롯하여 홍련, 백련, 황금련, 수련 물양귀비, 열대수련 등 20여종의 연꽃이 매년 6월부터 9월까지 만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러한 궁남지 연꽃축제는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사랑이 깃든 서동설화를 홍보하기 위하여 2003년 처음 개최된 이후 현재는 국내 최고의 역사 생태관광축제로 발전하였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공식행사, 주제관 전시회, 서동이벤트, 경연대회, 체험상설행사 등 30종의 다양한 행사가 있으며 웰빙굿뜨래 농특산물, 연·마 관련 상품 전시판매장이 펼쳐져 약 3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백제시대 이궁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했던 무왕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이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궁남지
궁남지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제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둘은 서로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래도 헤어질 수 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 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 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사랑이야기이다.

▷구드래조각공원길

궁남지를 돌아보고 나와 군수리 마을을 경유하여 걸어가면 신동엽 시비 앞에 백제교가 펼쳐져 있다. 다리 아래를 우회하여 구드래 제방을 거닐다 보면 백마강변의 수변공간과 부여 시가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구드래 조각공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 이곳은 둔치가 자연 잔디로 조성되어 있어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각종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등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구드래란 말의 구성은 구[大]가 왕칭어인 '어라하'와 접두어로 두 말 사이에 'ㄷ'이 지격촉음으로 끼어 든, 변성음으로 지금의 '구드래'로 불러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구드래는 대왕(大王)의 뜻을 담고 있으며, 곧 대왕이란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구다라'란 말은 일본이 백제를 '대왕국'이란 뜻으로 높여 부른 말이다.

부여군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문화유산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역사문화 도시이다.

특히 백제 사비 시대에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활발한 문화 교류를 통해 세련되고 격조 높은 문화 역량을 펼쳤다.

따스한 기운이 돋는 봄날, 부여를 도보여행을 통해 백제의 따뜻한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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