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영희 수필가

향기로 5월을 장식하던 장미가 그녀에게 배턴 터치했나 보다.

작은 도서관 그녀의 문학 강좌 마지막 시간에 끝으로 할 말 없느냐는 질문에 한 수강생이 상기돼 답변했다.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제 남편이 2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그날 선생님이 문상 와서 그러셨어요. 오늘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이니 이별을 잘하라고.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은 다 가는 길인데 아이들을 남기고 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이들 생각해서 굳세게 살라고. 덕분에 그날 이후 저는 이렇게 씩씩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오늘 처음 왔다는 다른 분의 말씀이 이어졌다.

"강사님은 제 영전 소식에 본인의 그릇을 한정하지 말고 마음껏 능력을 펴라고 응원하더니 퇴임식에 제2의 인생을 살라며 운동화를 사 가지고 왔어요. 그 운동화로 지금도 건강을 챙기고 있지요. 제가 퇴임사를 하며 주책스럽게 울먹였는데 손수건을 주어서 지금껏 간직하고 있답니다."

"사모님이 더 대단하시지요. 보통 분 같으면 외간 여자가 준 손수건 버리라 하셨을 텐데, 고마워서 제가 오늘 내외분 점심 대접하려고 같이 오시라 했습니다."

감동이고 반전이다. 그녀는 평소에 단톡방의 SNS도 적극적이고 호불호가 너무 확실한 편이라 감정표현이 과한 것은 아닌지 내심 물음표를 찍었는데. 늘 책을 가까이하며 본질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타인의 장점을 보는 줄 알았는데 피상적인 것만 보며 무난한 대인관계를 유지한다고 착각했나 보다. 아니면 아카시아의 진한 향기보다 개망초의 옅은 향을 좋아하는 취향이 작용한 것인지. 육십갑자를 더 살고도 이렇게 삶에 대한 순정과 사랑을 볼 줄 모르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다음이 내 강의 순서여서 장소도 둘러보고 준비도 할 겸 별생각 없이 참석했는데 사람의 향기가 전해 온다. 그녀와의 지나간 대화를 복기해 보았으나 깊이 인연을 맺을 만큼 떠오르는 게 없다. 문학 모임에서 마주치면 그냥 웃는 정도의 관계였으니.

나무에 탐스럽게 핀 하얀 눈꽃이 햇볕에 오래 있지 못하고 스르르 녹아내려 겉모습만 접하고 잘 몰랐던 관계 같다. 아니면 아름다운 꽃 위에 나비가 잠시 날아앉았던 찰나의 순간 정도 인연이었다고 한다면 과장 일지.

이채 시인은 '6월에 꿈꾸는 사랑'에서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 것이며 인생이 짧다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6월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찌 꽃뿐이라 할까."라고 노래한 것처럼 빠른 세월에 짧은 인생인데. 시절 인연과 용신(用神)에 생각이 머문다. 시절 인연은 불교의 업설과 인과응보설에 의한 것으로 사물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특정한 시간과 공간의 환경이 조성돼야 일어난다고 한다. 사주명리학에서 중히 여기는 용신은 내 사주에 없어도 준비하고 있으면 나에게 들어오는 기회를 말하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할지. 가수 임영웅에게는 미스터트롯이란 오디션이 용신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노래 잘하고 최선을 다했어도 그런 오디션이 없고 참가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히어로의 탄생은 없었으리라. 그래서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뒷머리가 없으니 지나가기 전에 확 잡으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녀와 나는 시절 인연이 없었다고 이렇게 풀어 놓는 것은 내 안목에 대해 면피하려는 핑계일지도 모른다. 케네디 연구소에서는 다년간의 연구 끝에 15퍼센트 자기의 능력과 85퍼센트 인간관계로 뜻을 이룰 수 있다고 발표했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소질이 다르고 그만의 독특한 향기와 노하우가 있을 터인데 나는 그녀에 대해 선입관을 가지고 눈을 감았던가.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나의 서투른 인간관계의 단면을 들여다보게 됐다.

이영희 수필가
이영희 수필가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 삼을만한 사람이 있다는 공자 말씀은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울림이 크다. 인품의 향기는 만 리를 간다고 하더니 그녀의 독특한 향기가 새벽 종소리처럼 고요히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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