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딸과 사위가 예약한 식당을 지나가는 광장에 빈 의자가 놓여 있었다. 조명을 받은 의자가 한층 밝아 보이는 포토 존이다. 손주들이 경쟁하듯 달려가 번갈아가며 앉아본다. 의자가 아기들보다 커서 발이 땅에 닿지 않고, 양팔을 쭉 뻗어도 팔걸이를 제대로 잡을 수가 없다. 의자에 앉은 모습이 왠지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래도 손주들의 해맑은 웃음과 재잘거리는 목소리는 싱그럽기만 하다.

잠시 후 아이들의 아빠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앉았다가 일어선다. 그들의 얼굴에 활기찬 힘이 드러나 보인다. 한층 젊은이다운 면모와 힘찬 모습 속에 의자의 무게를 느낀다. 세상 경험과 지식이 쌓인 세련된 느낌도 들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영상을 확인하며 즐거워한다. 젊음은 그래서 좋은가 보다. 의자에 앉는 사람만 바뀌었는데도 그 느낌이 너무도 달랐다.

반백이 된 중년 남자가 정원을 둘러보다가 빈 의자에 앉는다. 인생의 시련과 고뇌를 담은 주름살이 이마에 가득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유와 자태가 의젓하다. 주인이라도 찾은 듯 광장 물속에 비치는 의자는 불빛에 농익었다. 의자는 어떤 사람이 앉는가에 따라 묵직함이 다르다. 철부지 아이들이 앉을 때는 설익은 과일처럼 아쉬움과 기다림이 커지고, 인생경험이 적은 젊은이가 앉을 때는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넘어질까 걱정과 염려가 앞서기도 한다. 그러나 삶의 쓴맛과 단맛을 체득한 이가 앉을 때는 안심이 되어 입가엔 흐뭇한 미소를 띤다.

의자는 주인이 따로 없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앉으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왕이 앉으면 천하의 백성이 보이고, 예술가가 앉으면 화려한 음률과 축배의 노래가 들릴 것이다. 초라한 옷차림을 한 거지가 앉을 땐, 가난과 배고픔 뒤에 숨겨진 서러움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랑, 가난, 기침을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얼굴 표정에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처럼 빈 의자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무게와 색깔이 다르다.

희로애락을 겪은 내가 앉으면 어떤 느낌이 올까. 나는 저 빈 의자처럼 지금까지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을 또 보냈을까. 어쩌면 그동안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단순한 마음의 의자를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랑과 행복으로 눈물을 흘리고 감사하며 인생의 뒤안길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기를 바랐다. 어린아이가 오면 기쁘고, 젊은이가 앉아도 넉넉하며 푸근한 의자가 되고 싶었다. 세월에 지친 사람들이 쉬어가고 이별의 슬픔으로 절망에 허우적대던 사람이 위로받는 마음의 의자를 갖추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반평생을 살아오는 동안 내게도 여러 의자가 있었다. 책을 읽고 일기를 쓰던 의자, 직장에서 종일 앉아 미래의 꿈을 가꾸며 고민하던 의자, 행사장에서 팡파래를 울리며 개회식을 열던 의자, 음악회에서 노래에 열광하며 선율의 감미로움에 푹 빠져 행복함을 맛보던 의자도 있었다. 숲속 정원에 가서 앉으면 언제나 반갑다고 인사를 하던 친숙한 나무의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땀을 흘려도 좋고, 생활고에 시달린 눈물이 빈 의자에 뚝뚝 떨어져도 좋았다. 나는 그 빈 의자를 사랑한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차가운 북풍이 몰아쳐도 빈 의자는 네 다리로 꿋꿋하게 서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꽃이 피고 새싹이 나며 강산을 푸르름으로 덮을 때, 빈 의자엔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와 앉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이 와도 좋고, 피곤한 사람이 와서 앉아 쉬어도 좋다. 봄은 봄이고 여름은 여름이다. 가을엔 낙엽이 머물다 가고, 겨울엔 흰 눈이 밤새 앉았다가 동녘에 해가 뜨면 조용히 떠나 갈 것이다. 삶의 고됨을 위로해 주는 따스함은 어머니의 열두 폭 치마로 감싸주는 사랑처럼 포근하다. 돌고 돌아가는 세월의 인고 끝에 열매를 가득담은 빛깔이 우리 삶에 풍성한 감사로 넘친 적은 얼마나 있었던가. 올 겨울엔 두 손을 비벼 내 마음의 빈 의자를 따스하게 데워 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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