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난영 수필가

교양과 재미에 역사 인식까지 제고할 수 있는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인 '역사저널 그날'을 감명 깊게 보았다. 공영방송 50주년 기획, '잘살아 보세. 네 번째로 박정희 특명,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라'이었다. '500원 지폐로 이뤄낸 조선 신화'라는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1970년대 초 중화학 공업화를 결심한 박정희 대통령은 첫 번째 목표가 대형 조선소 건설이었다. 포항제철에서 나오는 철을 활용한 배를 만드는 것이 정부의 당면 과제였으나 조선 산업은 불모지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기업인 정주영의 모험정신이 만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대한민국 조선 산업이 세계 조선 수주량 1위의 자리에 오르는 수출 효자 산업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비화에 나도 모르게 TV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국민 경제와 국가안보 차원에서 꼭 진출해야 했던 조선 산업은 설계, 엔진 제작 등 모든 기술이 집약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핵심기술인 조선 기술자도 전무한 상태에서 초기자본도 없다. 대형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6천300만 달러 중 4천300만 달러를 외자로 충당해야만 했다. 4천300만 달러는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개발 예산의 15%였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큰돈의 86%나 부담해야 했던 현대도 호호막막했으리라.  

땅도 못 사놓고, 사업 계획서와 조선소가 건설될 울산 미포만의 허허벌판 백사장 사진을 들고 "돈을 꿔주면 여기다 조선소를 짓겠다."고 차관을 빌리려 다녔다니 기업의 명운을 거는 도박이었지 싶다. 대통령의 후광은 있다고 하나 국력은 약하고, 경제력도 약한 동양의 작은 나라에 누가 선뜻 돈을 빌려줄까. 미국과 일본에서 거절당하고, 영국으로 건너간다. 영국 선박 컨설턴트 회사 롱바톰 회장과도 협상이 좌절될 즈음, 그는 기지를 발휘한다. 거북선이 바다를 떠다니고 있는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대한민국은 해양 제국인 영국보다 무려 300년이나 먼저 철갑선을 만들었다. 산업화가 늦어서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한번 시작하면 잠재력이 분출될 것"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모습에 시시각각 조여오던 명치끝의 통증이 사라진 듯 가슴속이 시원했다. 기쁨도 잠시, 수출을 지원하는 영국 정부 수출신용보증국에서는 선박을 구매할 사람이 있다는 증명서를 요구한다.

어찌 대처할까? 조마조마했다. 설계도조차 없어 스코틀랜드 선박회사에서 26만 톤급 도면을 빌려왔다는 출연진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를 만나 "당신이 배를 사겠다고 계약해 주면 이 계약서를 담보로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차관을 얻고, 기계를 사들여 조선소를 지어 당신의 배를 만들어 주겠소."라고 말하는 맨주먹 마케팅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대 기업가답다. 리바노스도 그의 담대한 용기에 감탄했는지 26만 톤급 유조선 두 척을 계약한다. 갈채를 보냈다. 유년 시절부터 온 국민이 가난이라는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 그를 존경했다. 그래도 오늘처럼 멋져 보이기는 처음이다.

산 넘어 산이다. 배 납품 기일과 조선소 준공일은 한 달 차이다.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불굴의 그는 조선소가 있어야 선박 건조를 시작할 수 있다는 '통념'을 깨고, 조선소 건설과 유조선을 동시에 시작하는 발상의 전환으로 1974년 6월 조선소 준공식과 우리 기술로 만든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을 동시에 거행하는 쾌거를 이룬다. 애틀랜틱 배런호가 물에 뜬 날, 대한민국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한다. 조선 산업 10년 만에 조선 불모지에서 세계 조선 수주량 1위라는 엄청난 성장에 감격하여 가슴이 뭉클했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여 시청하는 내내 콧등이 시큰거렸다. '500원 지폐로 이뤄낸 조선 신화'는 대한민국을 세계 10대 경제 대국 반열에 오르게 하는 데 일조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정주영 회장은 한국 현대사에서 국가 경제발전에 가장 크게 이바지했다. '집념이 강한 사람에게는 하늘도 감동한다.'는 그의 철학에 비범함이 더해져서 조선 산업의 성공 신화를 이루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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