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아침 설거지 하다가 유리인척 하는 플라스틱 컵 아래 눌린 분홍빛 딸기 살과 초록 꽃받침을 보았다. 잔 밑에 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없었을 게다. 짓눌리지 않아도 꽃받침이 펴지기에는 충분했다. 색의 대비가 너무도 현란하다. 연한 분홍에 진한 초록. 살아있는 것은 자극에 반응한다. 그래, 자극이 필요하다. 언제부턴가 삶에 정체가 온 듯했다. 진전이 없고 지지부진했다. 적당한 자극이 없었던 게다.

가끔씩 가까운 장구봉 동산을 오른다. 적잖은 자극이 오니 반응을 한 게다. 지난 달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혈압이 높아 약을 먹어야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자면서 식이요법과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자극에 보인 내 나름의 반응이 장구봉 오르기다. 해발 수십 미터나 될까한 그 봉우리를 오를 때 1/3쯤 지점에서 숨이 찬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건강관리를 안했기로서니 이 정도란 말인가?

많은 이들이 자극이 많은 학교에서 적잖은 성취를 이룬다. 이런저런 몇 권의 책에서 청소년 시절에 겪었던 주인공들의 치기어린 일들을 읽었다. 주인공들이 그 시절 좌충우돌하던 모습들, 나락까지 내려간 글들을 읽으며 그런 기억조차 없는, 용기 없었던 내 청소년시절을 생각한다. 그때부터 자극에 반응을 보이는 게 서툴고 용기가 없었구나. 그 바탕에 무엇 하나 분명하지 못한 내 자신이 보인다. 힘이든, 배짱이든, 친화력이든, 어느 것 하나라도 가졌으면 저질러보았을 텐데, 늘 꼬리를 내리고 꽁무니를 빼던 비루한 모습이다.

눈높이를 낮추니 풀꽃들이 바람에 너풀거린다. 바람 부니 흔들리고 향기가 퍼져나간다.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오른다. 계단 자체가 자극이다. 산이 있기에 오른다고 답했던 이가 누구였던가? 한 발이라도 앞서려 펼치는 경쟁사회에서 뒤에서 좇아오는 이들만 자극은 아니다. 앞선 이들을 따라잡으려 당동거리며 살고 있으니 그들도 자극임에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나의 진정한 경쟁 상대는 자신이니 나 자체도 자극이다. 지지부진하다는 평가도 하나의 자극이다.

보다 강한 자극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질책과 꾸지람, 모멸감과 무시, 공개적 망신.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삶의 의욕이 꺾이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때에 내 삶에 강한 동기와 추진력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그런 험한 일을 당하지 않고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뛸 수 있으면 좋겠다. 어떻게 늘 즐겁고 빛나기만 바랄까? 계절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하루에도 낮과 밤이, 모든 것에 밝음과 어둠이 있는 것 아닌가?

딸기가 예쁜 모습으로 시장에 진열되어 있을 때도 볼만 했지만 내 집으로 와 냉장고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개수대에서 물세례를 받고 접시위에 올랐을 때, 그 숨 가쁜 과정을 거치고 내 손에 잡히고 이빨에 깨물려 잘리고 버려졌을 때, 유혹적인 모습이 만들어졌다. 그 후로도 다시는 눈길을 끌 수 없을 듯이 버려지고 마시고난 물 잔이 그 위에 얹혀 찢긴 살과 꽃받침이 지그시 눌렸을 때에야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 후로 남겨진 분홍 살과 꽃받침은 어찌 되었을까? 설거지물과 함께 수채에 버려져 하수에 떠내려가지 않으면 다시 모아져 쓰레기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망하기에 이른 것은 내게 준 유혹적인 자극으로 글이 남겨져 어느 순간 누군가에게 그의 모습을 일깨워 주는 존재로 전해지리라.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내 주변에 자극을 던지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것들을 받아들일 민감한 감성을 소유하고 있는지가 문제일 뿐이다. 앞에 자신을 두드려주기 원하는 컴퓨터 자판이 있고, 눈을 돌리면 언제까지 책상위에 널브러뜨려 두고 읽지 않을 것이냐고 항의하는 책들이 수북하다. 힘들여 책 만들어 보내주었더니 책뚜껑도 열어보지 않느냐고 책망하는 지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하지만 햇살이 저리 좋은데, 바람소리 날 자극하다 못해 잡아끄는데, 혈압 높다는 핑계마저 있는데 어찌 나가지 않고 안에서 버틸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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