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난영 수필가

눈 부신 햇살에 초록 이파리들이 반짝인다. 몸은 시간의 풍화 속으로 향해 가지만, 마음은 유년의 봄빛이다. 어린 시절, 사랑과 믿음의 꽃씨를 심었다. 물과 햇빛을 고루 받은 꽃씨는 무럭무럭 자라서 꽃나무가 되었다. 꽃나무는 믿음의 향기를 뿜어내고자 최선을 다했다.

시골에 중학교가 없어 오빠 집에서 다녔다. 옆집은 지대가 높아 마당에 서 있으면 창문이 2층처럼 보였다. 벽에는 빨간 덩굴장미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모네의 장미정원이 연상 되었다. 시골에서 흔히 보던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꽃도 있었으나 처음 보는 꽃이 많았다. 라일락, 모란, 덩굴장미 등. 은은한 라일락 향기에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정원 있는 집이 많지만, 60년대만 해도 자투리땅에는 꽃이 아닌 가족들의 생계에 도움이 되는 상추, 파 등의 푸성귀를 심었다. 꽃을 좋아하던 나는 별천지 같았다.

기둥을 타고 올라가서 창가에 꽃송이를 매단 덩굴장미는 환상적이었다. 꽃으로 뒤덮인 창문 안에는 예쁜 공주나 멋진 왕자님이 있을 것만 같았다. 까치발을 들어보고, 목을 빼 보아도 방안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주시해도 주인 내외를 제외하고는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학생 모자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빨간 덩굴장미가 한창인 어느 일요일, 놀러 온 친구에게 옆집 꽃밭이 마치 우리 것인 양 자랑을 늘어놓았다. 장황하게 떠벌리며 창문을 올려다보다가, 우리를 내려다보는 남학생의 눈과 마주쳤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 오뚝한 코, 입은 작았으나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머릿속이 하얘졌다. 홍당무가 되어 도망치듯 방으로 뛰어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는 싱글벙글하면서, 그동안 자기가 본 남학생 중에서 최고라나?

친구를 배웅하고 들어왔으나 좌불안석이었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주인행세를 하는 내가 얼마나 한심했을까. 허풍쟁이나 천둥벌거숭이로 비쳤을 것 같아 부끄럽고 창피했다. 걱정과 달리 쫑알쫑알 대던 내가 귀여웠던지 만날 때마다 미소를 머금었다.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하면서도 그를 만나는 날은 온종일 벙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주말이 기다려졌고, 방학이 기다려졌다. 그는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토요일에나 가끔 온다는 것이다. 나는 토요일이면 시골집에 가기 때문에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거였다. 창문에 불이 켜지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은 두근두근 방망이질 해댔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마당을 서성거리면 그가 나와서 미소 짓는다. 오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냇가 제방을 산책하면 따라나섰다. 보는 눈이 많아 나란히 걷지는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걸었다.

가물에 콩 나듯 만났지만, 마음 밭에는 사랑과 믿음의 나무가 자랐다. 공부 이야기로 시작해서 공부 이야기로 끝났지만, 설렘의 연속이었다. 말수가 별로 없는데도 사람을 즐겁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상급학교 진학이 불투명해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그를 만나면 꿈과 희망이 부풀었다. 잘될 것이라는 믿음은 날로 여물어 갔다. 아니나 다를까. 꿈에 그리던 여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마냥 부풀어 오르던 사랑의 꽃봉오리는 접어야 했으나 기쁨은 충만했다.

이른 아침, 서둘러 내 삶의 터전인 꽃뜨락으로 향한다. 작은 정원이지만, 수십 종의 꽃들이 돌림노래처럼 피고 진다. 요즈음은 덩굴장미가 그리운 이의 미소처럼 싱그럽게 반긴다. 송이송이 매달고 있는 붉은 꽃송이가 새벽이슬 한 모금에 영롱한 빛을 발한다. 새들도 옹기종기 모여 향기에 취한다. 쇠락해 가는 몸과 달리 마음은 봄이다.

이난영 수필가
이난영 수필가

차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옆집 오빠와 동생의 만남이 지속되지는 않았으나, 내게 버팀목이 되어 믿음의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어내는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도록 했다. 내가 참된 삶을 살았듯 그 역시도 참된 인생을 살았으리라. 지금은 같은 하늘에 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어디인들 어떤가. 머무는 곳이 안식처일 텐데. 덩굴장미를 보고 있노라니 도래샘 같은 맑은 웃음이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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