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산책]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20년 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를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긴장과 스트레스 가득한 직장에서 벗어나 여유와 자유로움이 넘치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광고 속 직장인에게서는 다시는 빼앗기고 싶지 않은 해방감이 느껴진다. 광고 속 메시지는 마음 깊숙이 '일과 일상에서 탈출'을 꿈꾸어 오던 수많은 직장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광고에는 일에 대한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 이에 따라 오래전부터 '워라벨(Work-Life Balance)'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이는 "에스프레소처럼 쓴 일에 크림처럼 달콤한 여가가 더해져야 삶이라는 한잔의 카푸치노가 완성된다."라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의 표현으로 설명된다. 즉, '워라벨'은 일과 개인적인 삶의 균형이라는 의미로 고된 일과 달콤한 여가가 더해져야 균형 잡힌 삶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라벨' 역시 일과 여가가 카푸치노 재료의 조합처럼 분리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해 『다시, 장인이다』 에서 장원섭은 일하는 삶을 카페라테에 비유한다. 커피와 크림이 분리된 카푸치노가 아니라 우유의 부드러운 단맛과 커피의 거친 쓴맛이 뒤섞인 카페라테라야 한다는 것이다. 일과 여가가 서로 뒤섞여 경계가 모호하지만 우아하면서도 새로운 맛을 내는 상태가 바람직하다는 의미이다. 팬데믹 시대에서 우리는 일과 삶이 서로 뒤섞여 분리할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한 바 있다. 일과 여가를 분리하기보다는 조화롭게 블렌딩하여 카페라테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워라블(Work-Life Blending)'의 관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일과 여가가 유기적 통합된 '워라블' 현상이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곳은 예술 분야이다. '워라블'을 잘 실현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 사용된 '아다지에토(Adagietto)'를 작곡한 구스타프 말러(1860∼1911)이다. 광적인 팬들이 많기로 유명한 후기낭만파 작곡가이다. 말러는 여름이면 지휘자로 활동하던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빈'을 떠나 인적이 드문 호숫가를 찾아 여가를 보내면서 많은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특히, 잘츠부르크 동쪽, 아름다운 숲과 호수가 있는 아터제(Steinbach am Attersee)에 직접 지은 작은 오두막에서 자신의 <전원교향곡>으로 알려진 교향곡 제3번을 작곡하였다.(1896년) 연주 시간만 100여 분에 달하는 이 대곡에는 음악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던 말러의 이상과 철학이 담겨 있다. 1악장은 목신 '판(Pan)'이 잠에서 깨어나 여름과 함께 대자연을 일깨우고, 2, 3악장에서 각각 '꽃들이 내게 말하는 것', '동물이 나에게 말하는 것'으로 자연에 대한 인상으로 충만하다. 아터제의 경관이 그대로 녹아든 대목이다. 어둠이 깔리자 그의 명상은 4악장 '인류가 내게 말하는 것' 5악장 '천상이 내게 말하는 것'을 거쳐 아름다운 천사의 노래에까지 다다르고 마지막 느린 악장에서 평온하고 무한한 사랑이 말하는 것을 펼쳐 보인다. 말러는 여름휴가 동안 작고 평화로운 오두막에서 주변의 자연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 인간과 천상의 세계까지 아우르는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킨 것이다.

말러의 오두막이 있는 아터제 호수를 즐겨 찾았던 또 다른 예술가가 있었다. 말러와 같은 시기 빈에서 활동했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다. 20세기의 여명이 밝았지만 19세기 황혼 속에 머물러 있던 세기말 빈에서 클림트는 언제나 진보와 변화의 선봉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구설과 비난이 함께 따라다녔다. 그럴 때마다 클림트는 번잡한 빈을 뒤로하고 호수를 찾아 그곳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래서 클림트가 남긴 아터제 호수의 풍경에는 그의 작품의 특징인 화려한 장식이나 관능적 여인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풍경만이 존재한다. 수십 점에 달하는 아터제 풍경화는 그의 작품 세계 가운데 독특한 한 줄기로 남게 되었다. 말러와 클림트가 여름휴가 동안 호숫가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자신의 예술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어떤 곳, 어떤 순간에서도 영감을 얻어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에게 일과 여가는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삶, 그 자체이다.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유인재 국가철도공단 상임감사·음악평론가

우리 역시, 일과 여가를 분리하거나 기계적 균형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조화로운 블렌딩이 필요하다. 여름휴가의 기간이 왔다. 말러가 작은 오두막에서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낸 음악을 작곡하고, 클림트가 풍경화로 내면의 또 다른 예술성을 드러냈듯이, 휴가 기간 동안 말러의 제3번 교향곡을 듣고, 클림트의 아터제 풍경화를 보면서 풀리지 않던 일과 답이 없던 삶의 실마리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얻기 바란다. 카푸치노보다는 뜻밖에 마주한 깊은 향의 카페라테 한잔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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