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적으로 네 번의 혁명 같은 변화가 자연에 있듯이 인생에도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허물 벗는 뱀이나 애벌레처럼 혁명과도 같은 시기가 각자에게 있을 것이고, 우리는 변화에 대한 몸부림으로 고통을 느끼게 될 테지만, 그 고통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알에서 깐 병아리같이, 껍질 벗은 매미처럼 한여름을 시원하고 장쾌하게 울고야 말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연약한 인간을 말살해버리는 외부의 고통도 결국 살아남게 될 인간에게는 영양제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코 고통을 아픔이라 부르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니체와 고흐', 스타북스, 2020.)

고통이란 계절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습관을 위한 학습과정이며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역경은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기에 '미운 오리 새끼'를 쓸 수 있었습니다." (안데르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이전과의 그 경계선에 고통은 위치하는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면 그때부터는 다시 그 변화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은 사라진다.

고통은 처음에는 경고 사인이었지만, 변화된 환경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해 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우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인 것이다.

세네카는 말한다.

"자네가 인생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개인적인 사정이나 공적인 사정으로 풀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가정해보세. 올가미에 걸린 사람은 처음에는 거추장스런 올가미를 간신히 견디지만 일단 그것을 화내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필연은 용감하게 견디는 법을 가르치고 습관은 쉬이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는 점을 명심하게나. 자네는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과 휴식과 쾌락을 발견하게 될 것이네.

자네가 불쾌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자연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도록 태어난 줄 알고는 불쾌한 일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습관을 만들어내어 가장 어려운 일에도 금세 친숙해지도록 만들었네.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호의라고 할 수 있네.

불행이 처음 우리를 가격했을 때와 같은 기세를 계속 유지한다면 견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저, 천병희 역, '인생이 왜 짧은가', 숲,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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