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조영의 수필가

긴 장마와 폭염, 다시 태풍으로 멈추었던 공사 현장이 다시 움직이나 보다.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로 잠을 깨운다. 백로들도 아침을 맞았다. 창문 가까이 날아가며 내지르는 소리가 반갑다. 근처 백로 서식지는 여름이 오는 동안 변화가 있었다. 소나무 숲 일부가 개발 현장으로 또 사라졌다. 쉴 곳이 부족한 백로들은 땅으로 내려와 앉아 있다. 비가 내리면 숲 주변을 낮게 맴도는 날갯짓이 애처롭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은 눈덩어리처럼 보인다.

오늘도 테크노폴리스 개발은 역동적이고 백로 서식지 환경과 생존은 늘 위태롭다. 우리, 안 떠날 거야. 도와줘. 피켓 들고 시위하듯 몇 마리는 숲을 지키고 있다. 공사장의 중장비는 점점 늘어나고 근처 주민 불만도 여전하다.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지금, 둥지를 지키려는 새와 터를 개발하는 인간과의 위태로운 거리가 아슬아슬하기만 하다.

백로 서식지가 내 집에서 가까이 보이는 것은 밭에 있던 시설 하우스며 몇 채 있던 집이 없어지고부터이다. 밭을 흙으로 메우고 다지고, 다시 메우고 다지면서 대형트럭이 수없이 오갔고 중장비가 바쁘게 움직였다. 각기 다른 밭들이 합쳐진 땅은 대형 운동장이 되었다. 나는 시야가 넓어졌다. 소나무 숲도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진다. 그곳에는 대형 트럭이 다니면서 만들어진 길이 여러 개다. 흙길은 자유롭고 자유로움은 흙먼지를 몰고 다닌다. 백로가 다니던 길도 있었을 것이다. 하늘 위의 길, 우리가 모르는 새들의 길은 자유를 잃었다. 백로의 날갯짓보다 빠른 트럭의 위용은 흙 길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긴 장마가 시작됐다.

흙은 생명을 품으면서 다시 부드러워졌다. 푸릇푸릇 싹이 올라왔다. 원래 밭이었던 곳이라 풀은 틈을 좁히며 터를 넓혔다. 바라보면 황량하기만 한 곳에 초록빛은 공허함을 채워주었고 백로 서식지로 가는 마음의 다리가 되었다. 공사가 시작되기까지 풀은 힘을 뻗어 넓혀갈 것이다. 그러나 풀의 위력이 공사가 잠시 멈춘 장소라서 아슬아슬하다. 존재를 드러내어 보호받지 못하는 것 중에 하나는 풀이다.

귀농 2년 차 농사짓는 우리 밭은 풀밭이 되었다. 한가롭게 집에서 밖의 풀을 볼 때는 생명의 힘이 놀라운데, 내가 뽑지 않으면 안 되는 밭의 풀 생명력은 기운찰수록 무섭다. 봄에는 고랑사이 풀도 뽑고 도라지 틈새 풀도 뽑으면서 여유롭게 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풀이 자라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갈팡질팡하는 사이 사람의 힘으로 뽑지 못할 만큼 뿌리를 내렸다. 풀도 우성이 있어서 약한 풀을 이긴 성질은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주변에 있는 것을 모두 초토화 시킨다. 도라지는 풀뿌리보다 깊게 뿌리를 내린다. 무성한 풀 속에서 잘 견디었다. 어느 날 풀꽃이 피었다. 망초였다. 강하고 질겨서 원망스럽던 풀이 밭 전체를 덮고 핀 흰 꽃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쳐다볼수록 애잔하고 황홀하다. 그 사이사이 보랏빛 도라지꽃도 피었다. 멀리서 보면 서로 어우러진 꽃은 신비로운 화원을 보는듯하다. 아침 일찍 밭둑을 걸으면 햇살에 뭉친 이슬이 톡, 툭 따라오고 망초꽃 물결에 휩싸이다가 다시 도라지꽃에 묻히는 기분은 하늘을 나는 듯 가볍다. 그러나 밭의 풀로 보면 한숨만 나온다. 망초 때문에 도라지 농사 망치는가 싶어 답답하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유례없는 장마로 인명 피해와 농작물 피해로 연일 가슴 아픈 소식만 들려온다. 밭으로 가는 마음도 불안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망초와 함께 있는 도라지는 그대로고, 풀이 없는 곳의 도라지는 모두 쓰러졌다. 지금까지 눈엣가시처럼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풀이 도라지의 지지대 역할을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지탱해 준 것은 다행이지만, 강한 뿌리 힘이 도라지 생육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를 일이다. 새옹지마 같은 풀 때문에 고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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