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한식 수필가

세상이 삭막을 넘어 살벌해지고 있다. 갑자기 여러 곳에서 묻지 마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지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살인 ? 상해 협박이 늘고 있다. 폭우가 나라를 휩쓸고 가더니 자연재해 보다 더 무서운 공포가 우리 사회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범죄와 사건이 없었던 때가 얼마나 될까만 무척 불안하다.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컴컴한 벽을 더듬는 심정이다.

거칠게라도 살펴보자. 그 대상은 사건을 일으키는 이들이겠다. 그들이라고 제 정신에 그런 일을 할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절망에 그 일들을 저지르는 것일 게다. 노력해 보아도 살기가 만만치 않은데 자신보다 힘들이지 않은 이들이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면 체념과 화가 솟아 날 게다.

웬만한 노력으로 신분상승이나 취직 결혼 내 집 마련을 꿈꾸지 못한다. 수시로 들려오는 억 소리 나는 소식들은 서민들을 더욱 열 받게 한다. 한 해 연봉이 수백, 수천억에 이르는 운동선수들과 연예인들의 화려한 생활, 넓고 윤기 나는 집들은 도에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그들의 각고의 노력과 좋은 시절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는 불안을 모르지 않는다. 많은 청소년들이 선망의 눈으로 화려한 그들을 바라본다. 방송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다.

화면은 더없이 휘황찬란한데 화면 밖의 자신은 너무 초라하다. 화려한 것들은 모두 적잖은 돈이 필요하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하지 않으니 한탕을 꿈꾼다. 물도 열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한동안 백도를 유지해야 끓는데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약속한 시간도 되기 전에 어디쯤 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문화 아닌가.

언제부턴가 생활에 조급함이 따라붙고 있다. 속도가 승패를 가르는 일을 많이 경험하다 보니 조금이라도 빠르기를 원한다. 기다리는 것에 화가 난다. 욕구가 충족되는 것에서 나아가 빨리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통제하기 어렵다. 생뚱맞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가장 밑바닥에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있을 것 같다. 손만 대면 원하는 화면이 화려하게 나타나고 빠른 손놀림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것도 진득하게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조작하면 주르륵 쏟아져 나온다. 순간에 정보를 확인할 수 있지만 내 지식이 되지는 못한다. 단편적인 정보를 얻는 데는 효과적이나 깊은 성찰과 종합적인 판단까지는 아니다. 어른들 보기에 그들이 대단한 지식을 소유한 것 같으나 그 통찰의 깊이에 이르면 글쎄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에 싸인 이들은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러 끔찍한 사건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절망을 폭발시킬 대상을 찾아 폭력으로 세상을 향한 분노를 쏟아내고 자신들의 삶을 파괴한다.

이런 때에 그 완충역할을 누가 감당해야 할까? 문학과 예술 그리고 종교가 해야 한다. 그들을 아우르는 마술 상자 같은 방송과 영화도 물론이다. 이런 기관들을 지원하는 것이 기업의 사회적 사명이자, 국가 존재의 의미이며 책무다. 사회가 더 어려워져 가는 것은 그들이 제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끝 모르는 자본 축적과 탐욕 경쟁이 펼쳐진다. 그 일에 일조한 게 은행이다. 열 배가 쌓여도 동그라미 하나면 그만이다. 무생물로서 시간과 함께 커가는 것이 돈이니 누가 그 위력을 당할 수 있을까? 물욕을 넘어 시대를 이끌어야 할 문학 예술인도 자본주의 늪에서 허덕이고, 종교도 그 역할을 감당 못하기는 매 한 가지이다.

최한식 수필가
최한식 수필가

어쩌자는 건가? 과도한 부의 축적을 비난해야 함에도, 거부들을 닮고 싶고 그렇게 되지 못해 안달이다. 인격을 세우고 삶의 방향을 바로 하는 것이 인문학인데 그 바람이 불어도 자본주의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세상 흐름과 거꾸로 살아보자. 사람답게, 의미 있게 사는 길은 돈에 좌우되지 않는다. 멀리 보고 이웃과 함께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은 어떨까? 메아리 없는 외침 같다. 정녕 어찌해야 하는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