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공사 첫날이다. 설계도의 위치를 따라 포크레인으로 땅을 판다. 레미콘을 넣기 위해 거푸집을 만들고, 믹서트럭에서 모래와 시멘트, 자갈이 섞인 혼합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무 넉가래로 밀고 당기며 기초공사가 마무리를 한다. 잔디밭과 정원을 꾸밀 곳을 마사토로 복토하려는데, 심어 두었던 느티나무가 장애물이다. 톱으로 줄기를 자르고 밭 한적한 곳에 쌓아 정리했다. 집터를 바라보는 아내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보인다.

잠시 둔덕에 앉아 땀을 닦으며 전기 톱날을 조정하고 있을 때다. 비명 소리가 나며 무엇인가 땅바닥에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비닐하우스 처마 끝을 정리하던 아내가 사다리에서 떨어진 것이다. 얼굴과 두 팔을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흐르고, 양 손목은 골절되어 옷소매를 붉게 물들였다. 바닥에는 이빨이 튕겨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가녀린 숨결이 멈추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아내를 보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고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

공사 현장에 있던 인부들이 급히 119를 불렀다. 이내 앰뷸런스와 구급대원이 달려와 목과 양 손목을 부목으로 고정하고 아내를 구급차에 태운 뒤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심한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니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고통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어 더욱 애가 탄다. 아내는 수술실로 들어가고 내게는 기다림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쳐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지막한 신음을 내며 아내가 수술실에서 나온다. 양 손목을 모두 붕대로 감은 손이 이동 침대 위로 보인다. 얼굴은 온통 피멍이 들었고, 눈을 뜨지 못한 채 통증을 호소한다. 간호사가 환자 운반구를 병실로 옮기는 동안 아내의 차가운 발목을 잡으며 따라갔다.

꽃다운 나이에 만나 자식을 키우고 희로애락을 나누며 40여 년 묵묵히 함께 걸어온 나의 동반자다. 비바람이 불고 슬픔에 잠겨 있을 때도 늘 곁에서 힘이 되어준 사람이다. 충청도 촌사람을 만나 문화 차이를 극복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고, 내 삶이 노래가 되고 평생을 사랑해도 부족한 사람이다. 두 볼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평소 집안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의외로 해야 할 일이 많아 당황스럽다. 밥과 설거지도 해야 하고, 방청소와 빨래까지 쉴 틈이 없다. 집안일을 한다는 것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다. 집 짓는 곳에 가서 진행 상황을 점검하랴, 매일 병원에 가서 아내를 위로하고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 주랴,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나날의 반복이다. 반찬 투정을 하고 작은 일에 불평했던 지난 일들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뜬눈으로 하룻밤을 지새우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아내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진다.

정년퇴임식장에서 반평생 동안 나를 위해 헌신한 아내의 손발이 되겠다고 약속한 것이 생각난다. 비록 아내가 다치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는 서로의 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경고로 알고 겸허히 받아들인다. 아내의 후유증이 있는가를 살펴보며 내가 잘 보호해야겠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긴 무더위가 지나고 청량한 비바람이 분다. 창문엔 작은 물방울들이 동그랗게 맺혀 흐른다. 아침이 오면 연둣빛 새순들도 돋아나고, 정원 뜨락의 꽃나무마다 노랗고 빨간 색색의 꽃봉오리가 기지개를 켤 것이다. 때가 되면, 아내도 양손에 감은 붕대를 풀고 집으로 돌아오리라. 즐거웠던 날들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 간직하고 살아야하겠다. 흘러가는 빗물을 보내고 익어가는 과일 향기를 기다린다. 멈칫했던 숨결의 긴 호흡이 다시 시작되고, 우리들의 보금자리는 하루가 다르게 쑤욱쓱 지어지고 있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