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벌집을 다시 지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정녕 포기와 좌절을 모르는 집단이다. 감정이 없는 동물인가 싶다. 물 폭탄을 무참히 쏘아대고 쇠막대로 집을 부수는 수모를 당해도 집을 짓고 있다. 정녕 불퇴를 모르는 집념이 강한 집단이다. 말벌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청아한 낙숫물 소리를 듣고 싶어 테라스에 처마를 만든 것이 잘못인가. 나의 인내를 시험하는 듯싶다.

벌집을 떼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생물은 인간이 마음대로 해서는 아니 될 자연의 하나라고 인디언은 적는다. 죄의식이 들어서다. 말벌이 집짓기를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원망스럽다. 눈앞에서 속사포처럼 날아다니는 말벌의 몸짓에 한동안 정원에 나서지를 못한다. 고민을 거듭하다 벌집을 떼어내기로 한다. 꿀벌 집에는 꿀이 가득하고, 말벌집에는 애벌레만 가득하다. 처마에서 떼어낸 말벌집 질감은 종이처럼 느껴진다. 꿀벌은 자기 몸에서 나온 밀랍으로 집을 짓는단다. 하지만, 말벌집은 일벌들이 나무를 씹어 연하게 한 뒤 집을 다닥다닥 이어 붙인다. 여러 달 말벌의 행적을 살피니 입에 무언가를 물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날아다닌 건 집짓기에 열중해서다.

벌들의 눈치를 살피며 하늘정원으로 겨우 나선다. 어느새 분꽃이 콩알만 한 씨앗을 물고, 해바라기는 앙다문 꽃봉오리를 열고 있다. 주먹만 한 수국꽃 줄기가 늘어져 바람결에 너울거린다. 나무수국은 여느 꽃나무보다 물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물 호수로 나무뿌리 부근에 물을 듬뿍 주고, 나뭇가지에도 물을 뿌리는 순간이다. 눈앞에서 무언가 쏜살같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말벌이다.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질 못한다. 나뭇가지 틈새에 이미 육각형 모양의 벌집을 만들어 놓은 상태이다. 정녕 장벽이 없는 동물이 말벌인가 싶다. 불굴의 의지를 불태우는 말벌을 생각하다가 얼마 전에 보았던 화가를 떠올린다.

피카소가 사다리에 올라 흰 벽에 달라붙어 신들린 듯 무언가를 그린다. 밑그림도 없는 상태이다. 자기 머릿속 도안을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몸이 시키는 대로 손이 저절로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의 몸짓에 여러 생각이 겹친다. 피카소는 지금껏 화가로만 알고 있었다. 도예전에서 100여 점의 작품을 보고야 조각, 도예, 판화 등 모든 분야를 섭렵한 화가라는 걸 알게 된다. 장벽 없이 두루 창작의 영역을 넓혀간 피카소가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텃세가 많은 예술계에서 장벽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기까지 자기 영혼을 얼마나 혹독하게 담금질했으랴. 말벌은 종족 번식이라는 절대 사명의 의지를 불태우지만, 피카소는 그림을 넘어 바깥 세계까지 무엇을 갈구한 것일까.

피카소가 넘지 못할 벽은 없는 듯싶다. 피카소의 도자 「네 명의 춤추는 사람들, 1956」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대 위의 무용수가 춤을 추는 듯 내가 느낀 감정을 파르믈랭도 느낀 것일까. 푸르나 작업실의 독특한 분위기를 엘렌 파르믈랭은 '고요한 밤, 손바닥만 한 인물들이 도자기 위를 뛰어다니고, 모두 춤을 추거나 움직이고 있었다'라고 적는다. 작품마다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참으로 피카소와 수집가는 여느 전문가보다 문화 예술의 조예가 깊고 애정이 드높다. 뭇사람은 한 기업가의 수집 덕분에 피카소의 명작을 노력도 없이 융숭히 대접받는다.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이은희 수필가·㈜대원 전무이사

우리가 넘지 못할 벽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속 문지기는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벽이야.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부술 수 없고."라고 문지기는 단언한다. 과연 그럴까? 함부로 단언하지 말자. 이 땅의 숨탄것이 들으면 실망하리라. 말벌도 종족 보존하고자 벌집을 고수하며 온몸으로 항변하고 있잖은가. 그대가 맞닥뜨린 대상이 벽돌담이든 인간의 마음이든, 예술 세계는 더욱 그렇다. 작가의 심혼은 어디든 뛰어넘는다. 아니 뛰어넘을 수 있다. 얼어붙은 관념의 벽을 깨트린 삶은 더욱 풍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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