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인문학] 허건식 용인대 대학원 객원교수 체육학박사

1947년 4월 워싱턴의 한 호텔에서 파티가 열렸다. 미국의 유명 인사와 외교사절들도 함께 하고 있다. 이 파티의 주인공은 이제 막 해방된 나라에서 온 서윤복이라는 24살 청년이었다.

일제 말기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체육과목이 교련으로 대체되었고 경기대회가 모두 폐지되는 체육의 암흑기였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가장 먼저 부활한 종목이 축구와 마라톤이다. 우리 국민들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1940년과 1944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한 탓에, 해방과 더불어 국제대회에서 마라톤의 영광을 기대했다.

손기정을 비롯해 베를린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은 조선마라손(톤)보급회를 결성해 유망주 발굴에 나섰다. 이 당시 서윤복과 함기용을 발탁한 손기정은 자신의 돈암동의 집을 합숙소로 정하고 훈련했다. 이 시기 손기정은 "돈 생겼다. 합숙하자."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당시 은행직원이었던 손기정은 독지가를 찾아가 약간이라도 돈이 모이면 곧 서윤복 등 유망주를 소집해 맹훈련을 했다. 베를린에서 일장기가 올라간 설움 때문인지 손기정은 마당에 기둥을 세우고, 훈련생들과 아침 6시에 일어나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1947년에 조선육상경기연맹에 보스턴 마라톤 조직위원회의 초청장이 전달되었다. 대회 주최측이 11년전 베를린올림픽에서 1위와 3위를 한 손기정과 남승룡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우수한 한국 선수의 출전을 원했다. 하지만 출전을 준비하는데 문제가 많았다. 정부수립이 이루어지기 전이라 남한 정치상황은 불안한 시기였으며, 실제 국가 지배자는 미군정청이었다.

미군정청 문교부의 허가를 받고, 군정청 직원들이 모금을 해 마련한 여비를 가지고 먼길을 떠났다. 미군용기를 타고 호놀룰루와 센프란시스코, 뉴욕을 거쳐 6일만에 보스턴에 도착했다. 당시 여론에서는 신출내기 서윤복과 올림픽 동메달을 땄지만 한물간 마라토너 남승룡에 대해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서윤복의 레이스는 돋보였다. 선두를 달리며 결승선이 다가오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승을 눈앞에 두고 달리는데 개 한 마리가 짖으며 달려들어 걷어차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선두를 내 주었고, 다시 일어나 달리는데 이제는 운동화끈이 풀려 방해를 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어 앞선 선수를 추월해 우승했다. 서윤복은 자신의 레이스가 고통을 이겨내며 몸부림치는 조국의 모습과 같이 느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그는 우승 직후 기자들에게 "한국의 완전독립을 염원하는 동포들에게 승리를 선물로 바친다."고 말했다. 1910년 이래 일본의 지배를 받은 이후 완전한 독립을 염원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사기를 올려 준 것이며, 그의 스승인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함께 한 것처럼 조국과 민족을 안고 달린 것이다.

서윤복의 우승은 당시 세계신기록이면서 동양인 최초의 우승이라는 점에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 특히 미군정하의 신생독립국 과정에 있던 조국을 알리기 위해 미국 각지를 43일간 순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들은 오랜 일정을 마치고 동남아와 일본을 거쳐 화물선으로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예정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인천항에는 그들을 환영하려는 인파들이 밤을 지새며 환영했고, 서울시민들은 집집마다 30원씩 성금을 모아 시민환영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김구는 발로 세계를 제패했다는 의미의 '족패천하(足覇天下)' 휘호를 쓰며 기뻐하였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도 자신이 수 십년간 독립운동한 것보다 2시간 남짓 마라톤이 더 매스컴을 많이 탔다고 환영사에서 조크를 던지기도 하였다.

허건식 용인대 대학원 객원교수 체육학박사 
허건식 용인대 대학원 객원교수 체육학박사 

서윤복은 재건의 시기인 미군정 치하에서 최초로 'KOREA'라는 국호와 태극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착용하고 해외 원정에 나서 우수한 역량과 기개를 객관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마라톤으로 회복한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세계 강호들을 뛰어 넘어 우승의 희열을 온 국민들에게 전달했다. 약소국이면서 가난한 조선의 열등감을 극적으로 환치하는 연출을 한 것이다. 또한 사회통합 기제로서 스포츠의 가치를 구현한 해방이후 대표적 사례가 되었으며, 이 우승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가입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서윤복은 해방이후 최초의 스포츠외교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서윤복과 그를 길러낸 손기정, 남승룡의 여정을 담아낸 영화가 개봉되었다. 많은 이들이 마라톤을 생각하면 손기정과 남승룡만 알았던 시대에 서윤복이 부활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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