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똑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40대 후반의 아버지가 아들 손을 잡고 서 있다. 할머니가 계시는 읍 소재지 학교로 전학을 오겠다며 교장실을 찾아왔다. 자리에 앉게 한 후 부모의 주소이전과 사유를 물었더니 자신은 이혼을 했고, 조만간 재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학생만 할머니 집에 남겨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천겁인데, 그것을 끊는다는 말에 목젖을 무언가 치밀고 오른다. "이 아이는 누구를 보고 자라며, 어떻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합니까?"하고 되물었다. "전학을 받아 주세요."만 반복하며 부탁할 뿐, 고개를 떨군 아버지는 묵묵부답이다. 어둑살이 내려앉는 밤처럼 고요한 침묵만 흐른다.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은 학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가 오는 날, 지붕을 잃어버린 집에서 젖은 몸과 깃털을 떨며 웅크리고 있는 아기 새의 모습이다. 어린 가슴에 이별의 슬픔과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 누구를 탓하며, 누구에게 이 인과因果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힘이 없고 가진 것 없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모습은 갈바람에 흔들리며 검은 심지를 태우는 촛불처럼 나의 가슴을 태운다.

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 방송에서 가족 상봉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전쟁의 물리적 힘으로 남북이 갈라지고, 가족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은 상처는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이념의 갈등 속에서 부모와 자녀가 생이별하고, 형제와 친척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서로 모른다. 얼굴의 특징과 목소리를 기억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만나는 모습은 전 국민을 감격시키고, 살아있는 드라마로 밤잠을 설쳤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며 얼싸안고 사랑을 나누는 정으로 몸부림쳤다. 서로 볼을 부비며, 엄마야 누나야 목 놓아 소리치며 울던 그 감동의 장면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자리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님에도, 부모와 자식이 헤어져야 하는 것이다. 자식의 손을 놓고 가는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탈까. 물보다 진한 것이 혈육의 정이 아니던가. 무엇으로 당위성을 설명해야 할까.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이산가족들은 서로 그리워하며 저토록 애타게 찾는데, 혈육의 끈을 놓고 떠나야 한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 슬픔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싸매어 줄 수 있을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아이에게 어떤 촛불을 손에 쥐여주어야 하는가. 우리의 삶에서 상처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온다. 그 고통으로 아파하며 괴로워하고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상처의 고통을 극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다만 참고 견딜 뿐이다. 이별의 상처를 싸매줄 사랑의 붕대를 찾아야겠다.

내게도 상처로 인한 흉터가 남아있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다 넘어졌다. 어머님께 말씀을 드리면 혼날 것 같아 바지로 가리고 꾹 참았다. 다리안쪽의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고통이 오기 때문에 괴로웠다. 그곳은 치료하지 못한 채 아물어 아직도 흉터가 넓게 자리하고 있다. 흉터는 남았지만 아프지는 않다. 지금도 그 흉터를 보면 속상하고 보기가 싫다. 관심을 갖고 싸매주었다면 흔적이 훨씬 작아졌을지도 모른다. 육체의 상처는 싸매면 뼈가 붙고 새로운 살이 돋아나 치료가 되지만, 한번 받은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고 흔적이 영원토록 남는다.

내 인생길에서도 숱한 고난의 흔적들이 있다. 어린 생명을 사흘 만에 잃고 슬픔에 잠겼던 날들이 있었고, 어두운 손으로 인해 승진할 자리에 가지 못해 가슴 아파하던 시간도 있었다. 가난과 배고픔으로 얼룩진 옹이는 아직도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상처는 흉터라는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은 마음에 얼룩을 남긴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추억이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운 원동력이 되었다.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김영기 전 충북교육과학연구원장

오늘,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어린 새와 더불어 살며, 상처를 어루만지고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고통을 잊게 해주고 싶다. 두 손을 잡고 눈을 씽긋하며 웃음을 보냈다. 마주앉은 아이의 입가에도 꽃봉오리가 벙글 듯 엷은 미소가 피어난다. 세월의 밀물이 파도와 함께 하얀 거품을 몰고와 상처의 흔적을 지우면, 아픔을 잊고 다시 행복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 아이가 볼그레한 두 볼에 남긴 눈물자국을 손끝으로 가만히 닦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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