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경구 아동문학가

몇 년 전 집 입구에 나팔꽃이 가득 피었다. 몇몇 사람들은 우리 집을 '나팔꽃집'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연히 얻은 나팔꽃 씨앗을 여기저기 심었다. 꽃이나 나무 키우는 것을 잘 못하는 나는 어느 것 하나라도 피어나라고 나팔꽃 씨앗을 몽땅 심었다. 얼마 후 여기저기 연둣빛 싹이 쏙쏙 고개를 내밀었다.

주택에 살면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다. 우선 이사를 오자마자 감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줄박 씨앗'을 심었다. '줄박'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고 얼마나 길까 궁금했다. 마당과 집 입구 골목에 씨앗을 심고 정성껏 물도 주었다. 호박씨를 심고 싶었는데…. 다 같은 박 종류니 괜찮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난 후 달빛에 하얀 박꽃이 피었다. 오이만한 박이 후~, 입김을 불어 넣은 풍선처럼 기다래졌다. 길쭉길쭉한 줄박을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비가 온 다음 날 아침이면 쭉쭉 길어진 것이 느껴졌다. 마당 벽과 집 입구 골목 벽에도 박 덩굴이 마치 담쟁이덩굴처럼 반짝였다.

그런 풍경을 보며 사람들도 신기한지 한 마디씩 했다. 또 맛은 어떨까, 궁금하다고 했다. 그럼 원하는 박을 뚝, 따서 드렸다. 많이 따 주었는데도 자꾸 자꾸 박이 달리니 늘 그대로인 것 같았다.

처음 오이만할 때는 귀엽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도깨비 방망이처럼 커가니 얼마나 커질까 비만 오면 자세히 살펴보곤 했다. 또 어찌나 많이 달리는지 아침마다 누군가 줄줄줄 내다 걸어 놓은 것 같았다.

얼마 후 마당에도 작은 집을 짓게 되어 더 이상 심지 못했다. 대신 집 입구에 작은 꽃밭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때 심은 게 바로 나팔꽃 씨앗이다.

이사를 많이 하면서 어느 순간 나팔꽃을 보지 못했다. 늘 흔하게 보던 나팔꽃이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지인과 함께 가다가 하수구 옆에 핀 나팔꽃을 보았다.

"어, 나팔꽃이네. 아! 예뻐라."

지인은 쪼그리고 앉아 나팔꽃을 보는 나를 한참 쳐다봤다. 그 흔한 나팔꽃에 감탄하는 내가 이상했고, 게다가 그 나팔꽃은 뽀얗게 먼지가 앉았기 때문이란다.

난 먼지가 보이지 않았고, 와락,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그 이후 나팔꽃 씨앗을 얻었다. 하얀 편지봉투에 '나팔꽃'이라고 이름을 쓰고 봄이 오자 얼른 심었다.

여기저기 싹이 나왔다. 그리고 줄기를 뻗기 시작했다. 나는 낚싯줄을 샀다. 땅에서부터 벽 쪽으로 낚싯줄을 묶었다. 그리고 그 낚싯줄에 가로로 줄을 엮었다.

얼마 후 나팔꽃 덩굴은 신나게 줄을 타고 올라갔다. 예전 긴 박 덩굴처럼 벽을 온통 나팔꽃으로 휘감았다. 보라색과 빨간색 나팔꽃이 모여 있으니 더 예쁘고 보기도 좋았다.

특별히 손이 안 가도 척척 줄을 타고 잘도 올라가 기특했다. 예쁜 나팔꽃을 팡팡 피웠다. 마치 초록색 도화지에 보라색과 빨간색 모자이크를 하는 것처럼.

동네 어르신들은 나팔꽃이 예쁘다며 계단에 앉아 쉬어가곤 했다. 나팔꽃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기쁨의 나팔을 막 불어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책 정리를 하다가 깜빡 잊은 봉투 두 개가 툭, 떨어졌다. 정용원 선생님이 '접시꽃 비행접시' 새 동시집을 보내주었다. 선생님은 내가 태어나던 해 한 신문에 동시 '거미줄'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보내 주신 동시집은 모든 내용이 접시꽃에 관한 거였다. 첫째 마당 '비행접시가 온다면'으로 시작해 접시꽃 어머니, 접시꽃 피는 마을, 제주도로 시집간 접시꽃, 천년 된 접시로 구성되었다.

동시집과 함께 보내 준 것이 있었다. 누런 편지봉투에 담은 접시꽃 씨앗이다. 봉투에는 하얀 종이에 접시꽃 설명과 심는 방법에 대해 쓴 글을 붙여 놓았다. 책과 함께 받은 씨앗은 처음이라 잘 보관하다 심으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잘 보관한 탓에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다 찾게 된 것이다.

접시꽃하면 동량 우체국이 생각난다. 동량 우체국 앞에는 가로로 된 기다란 꽃밭이 있다. 맨 앞쪽에 접시꽃이 활짝 피었다. 휴대폰으로 찰칵,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며 꼭 별 하나가 숨어 있는 듯하다. 빗물이 뽀드득 씻겨주고 바람이 솔솔 말려주었는지 눈부신 접시꽃.

일 관계로 일주일에 한 번 동량에 가는데 갈 때마다 늘 꽃을 피웠다. 비가 내린 다음에도 반짝이는 얼굴로 꼿꼿하게 선 접시꽃이 대단해 보였다.

김경구 아동문학가
김경구 아동문학가

내년에는 우리 집이 '접시꽃집'으로 불리지 않을까 싶다. 접시꽃 씨앗을 꽃밭과 빈 땅에 가득 심을 계획이다. 예쁜 접시가게를 차려도 될 것만 같다.

편지봉투 속에서 코코 잠든 접시꽃 씨앗. 쿨쿨 겨울 잠 잘 자고 봄에 만나길…. 아, 내 마음 밭에도 2024년의 꿈씨 하나 심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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