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밤새 산 내리바람이 나무의 옷을 벗겼던가. 소사나무가 헐벗은 모습이다. 요즘 노랗게 물든 나무에서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있었는데 아쉽다. 줄기만 앙상히 남은 모습에서 계절을 실감한다. 바람은 정녕 모든 식어가는 것들을 부추기는가. 어차피 바람이 돕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인데 갈 길을 부채질하는 모습이 얄궂다. 줄기와 한 몸인 잎새를 낙엽으로 만드는 얄미운 대상이 어디 바람뿐이랴. 차가운 공기와 서리, 안개와 구름, 날갯짓하는 새들도 있다. 이즈음 단풍잎은 처마 밑 풍경소리에도 낙화하리라. 가만히 바라보면, 나무도 식어가는 나뭇잎의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 마치 불타는 열정의 기운을 꺾는 일이 만물의 순리라는 듯 손을 놓아버린다.

11월의 심장으로 들수록 조석으로 기온 차이가 심해진다. 그래선가, 초겨울 노을빛은 색다르다. 저 멀리 검은 산은 붉은 태양을 삼키는 중이다. 노을은 도시 전체를 불을 놓은 듯 붉디붉다. 매번 '산은 붉은 태양을 품어 얼마나 뜨거울까'라는 부질없는 생각에 다다른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노을도 스러지고 어둠이 짙게 깔린다. 이어 지상의 별들이 가물거리며 피어난다. 이렇듯 태양의 기운이 식어가는 것도 순식간이다. 매번 바라보는 저물녘 풍경에 오늘은 온몸의 감각세포를 일깨운다.

꽃이 꽃봉오리를 터트릴 때는 죽을힘을 다하여 피운단다. 마치 산모가 아이를 낳듯 신열을 앓는다. 진통으로 눈물을 흘린 듯 꽃잎 끝에 작은 이슬이 맺혀 있다. 이슬은 마치 작은 다이아몬드처럼 영롱하며, 그 안에 꽃을 품고 있다. 나는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태양이 노을을 그리며 식어가는 그 순간, 꽃잎이 난분분하던 낙화의 그 짧은 순간을 기록하고 싶어서다.

한 생애를 다한 식어가는 것들의 최후는 단호하다. 참으로 냉정할 정도이다. 작렬하게 스러지는 태양은 자신의 마음을 붉게 드러낸다. 마치 붉은 피를 토하는 듯 노을로 물들이다가 자신의 모습을 흔적도 없이 감춰버린다. 지구상의 식물은 대부분 아무도 모르게 식어간다. 기억 속 식물 하나가 동백꽃이다. 마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줄기에서 단호히 목을 꺾는 식물이다. 참으로 처연하게 꽃송이를 떨구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든 식어가는 것들에 마음이 움직인다. 무생물인 태양이 발현한 노을을 바라보며 무시로 눈시울이 젖고, 생물인 꽃잎이 스러질 때도 애잔하기는 마찬가지다. 꽃송이가 꽃대에서 말라버리는 수국은 그나마 보기 좋다. 온기를 잃고 꽃잎이 공중을 부유하다 바닥에 널브러지면, 차마 밟기가 안타까울 지경이다. 그러니 인간이 수명을 다하여 온기를 잃어갈 때의 모습은 어떠한가. 구십 중반 상노인의 삶이 증명하리라. 그분은 남들이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한여름에도 누비옷과 패딩 조끼를 껴입고도 춥다고 말씀하신다. 한번은 발이 시려서 병원 진료를 받으니, 의사의 말이 노화가 원인이란다. 말초신경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해서다. 처방 약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는 노인의 쓸쓸함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인간의 몸은 나이가 들수록 차츰 온기가 식어가는 중이다.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이은희 ㈜대원 경영지원본부장·수필가  

모든 식어가는 것들에 찬사와 위로를 보낸다. 아니 가벼운 묵례를 드리리라. 주위에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생애가 무수하다. 나무는 겨울을 준비하며 나뭇잎을 털어내고, 태양은 내일을 위하여 하루를 장렬히 마감한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나이 듦은 설움처럼 느껴지기도 하리라. 삶이 덧없을지라도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지금은 식어가는 것들에 숭고함이 느꺼운 늦가을,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박인희의 노래처럼 우리는 사랑하며 남은 길을 걸어가리라. 담벼락에 한 장의 나뭇잎처럼 흔들리는 12월, 삭풍을 견디는 나무에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