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조영의 수필가

탁상용 달력은 내 삶의 기록이고 알림장이다. 기억만큼 메모하고 중요한 것부터 색깔로, 도형으로 구분해 놓지만, 가끔은 생각 없이 쳐다보고 비슷한 것끼리 겹쳐놓아서 실수도 한다. 그중'중부매일 원고 마감'메모는 반가우면서도 긴장된다. 소재가 있으면 여유 있는 기다림이 되는데 무엇을 쓸까? 고민이 많으면 원고 마감 다가오는 시간이 거인 발소리만큼 크고 바람처럼 빠르다. 이번에도 원고 마감이 가까이 다가와서야 펜을 들었다.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다. 벼락치기 시험공부 하는 학생처럼 뒤늦은 후회 하고 반성한다.

지호는 4학년이다. 아침 자습 시간에 400자 원고지에 매일 글을 쓴다고 한다. 400자도 놀라운데 원고지에 쓴다고 하니 궁금해졌다. 400자를 쓸 수 있니? 그것도 매일. 내 질문에 특유의 웃음으로 자신감을 보여준다. 담임선생님은 400자 원고지를 인쇄해서 나눠주고 주제를 주어 글을 쓰게 하는데 나와 만난 날은'하늘의 구름을 떠먹으면 어떤 맛일까'주제였다. 자신 있게 썼다고 했다.

순간 나도 구름의 맛에 대해 떠올렸다. 흥미롭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400자라는 부담의 무게가 느껴졌다. 다른 아이들은 원고지도 모르고 본 적 없고 400자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수업 흐름이 글쓰기로 잠시 바뀌었다. 글감 찾기, 얼거리 짜기, 글쓰기를 설명하는데 오랫동안 글쓰기 지도에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글쓰기를 어려워하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소심한 핑계다. 아이들의 생기 있는 눈빛을 보면서 상쾌한 아침, 원고지에 글 쓰는 지호네 반 연필 소리가 울림으로 다가왔다.

기억을 따라 올라가면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국어 시간 준비물은 편지지였고 숙제는 신문의 사설 써오기였다. 날씨가 유난히 맑거나 비가 내리는 날, 교정의 나뭇잎 색깔이 예쁠 때면 편지지를 꺼내라고 하셨다. 글을 쓰기 싫은 친구들은 편지지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거부했다. 선생님은 여학생 가방에 편지지가 없음을 나무라듯 꾸짖으며 준비한 편지지를 나눠주셨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에도 나는, 편지 쓰는 자유로운 시간을 은밀히 즐기고 기다렸다.

지금은 편지지와 원고지, 한자가 있는 사설을 기억하면 나이를 가늠할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숙제처럼 글을 쓰고 숙제가 연습의 결과가 되어 지금까지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호네 반도 아침 시간에 글을 쓰는 400자 원고지에 담는 생각이, 바르고 멋있게 성장하는 바탕이 되리라 믿는다. 또 청주를 대표하는 작가로 나아가 대한민국을 빛내는 노벨문학상이 지호네 반아이들에게서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앞날의 일이라서 축복하는 마음만으로도 흐뭇하다.

소설가인 은사님의 하루는 서재에서부터 시작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구상하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글을 쓴다고 하셨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조용히 앉아만 계신다고 한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요? 엉뚱한 내 질문은 의심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여든이 넘고 조금씩 건강 이상이 보이는데 의자에 오래 앉아 있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소설의 마지막 목표가 있기 때문에 매일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고 하셨다.

조영의 수필가
조영의 수필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글쓰기가 두려워질 때 은사님 삶의 철학과 어린 지호가 매일 쓰는 400자를 떠올리며 게으른 나를 채찍질한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쓸데없이 분주하고 세상일에 궁금하여 집중하고 진중하지 못했다. 새해는 처음처럼 연습하고, 연습함을 즐기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2024년 새해 달력에 첫 번째 쓸 약속이고 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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