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조선 초기에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김수성이요, 본관이 영산(충북 영동) 김씨로 명문 사대부가 출신이다. 증조부 김길원은 영의정 급인 영산 부원군이었다. 김수성은 이른 나이에 성균관에 들어갈 정도로 총명했다. 15세쯤 아버지 김훈이 유배형에 처하자 성균관에서 퇴학당하고 출가한다. 당대의 최고 학승인 함허대사의 제자가 되어 신미라는 법명을 받는다. 신미는 출가 후 불교 대장경을 섭렵하고 범어 등 외국어에 달통한다. 출가 전에 예문관 대제학이었던 외조부 이행으로부터 주역 등 성리학을 배웠기에, 유교와 불교를 아우르는 당대의 석학이 된다.

보은 속리산 입구 정이품송 공원. 이는 신미를 기리는 역사 공원이다. 처음에는 훈민정음 마당이었다. 2019년 영화'나랏말싸미'로 신미대사가 세상에 알려지자, 보은군에서 이미 조성해 놓았던 훈민정음 마당이 문제가 되었다. 바로 신미에 대한 역사적 기술 내용이었다. 당시 이렇게 적어 놓았었다.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 신미대사'라고…. 아니, 지자체인 보은군에서 이렇게 써 놓았다니, 누구나 놀랄 일이다. 아니, 한글을 세종이 만들지 않고 스님이 만들었다고?

나는'훈민정음 비밀코드와 신미대사'라는 책을 냈기에 그 과정을 잘 안다. 지난 연말 속리산에 갔다가 정이품송 공원에 들렀다. 앗, 큰 오류를 발견했다. 신미대사 동상이 있는 곳의 바닥에 세종과 신미의 만남을 기술해 놓았는데, 누가 보아도 맞지 않는 게 있었다. 이는 내가 책에서 상세하게 다루었는데 명백한 오류다.

그게 뭘까. 조선왕조실록을 뒤질 필요도 없다. 거기 역사 공원에 기록되어 있는 신미 행장만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미는 1446년(병인년) 3월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죽자 장례식을 주관한다. 실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아니, 세종이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을 아무에게나 맡겼을까.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아내의 장례를 맡길 정도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런데 동상 밑바닥 돌에 써 놓기를, 세종이 1450년(경오년)에 신미를 만났다고 해 놓았다. 이름은 1446년에 처음 듣고, 4년 후인 1450년에 처음 신미를 만났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세종은 1450년 2월 17일 막내아들 영응대군 사저에서 운명한다. 겨우, 몇 달 신미를 만나고 그 엄청난 우국이세 등 26자나 되는 긴 칭호를 내렸다는 말인가. 또, 신미가 주석하고 있는 복천사 중수를 명했다는 말인가.

또, 김수온(신미의 둘째 동생, 집현전 학사)이 세조의 명을 받아 쓴 복천사기를 심히 왜곡하고 있다. 분명히 복천사에 관한 기술인데, 이를 내불당이라고 해 놓았다. 복천사기에는 산세가 절경이며 산골짜기라는 말이 나온다. 이건 속리산 복천사를 말하는 것이지, 경복궁 안에 있었던 내불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지금의 복천암에 가보면, 기암괴석이 암자 주변에 솟아있다.

2019년 한글 단체 등의 항의와 요구로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우선'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라는 말을 삭제했다. 공원 담벼락의 신미 관련 기술을 대폭 수정하고, 우국이세 마당에 있었던 세종 동상을 철거했다. 동상 앞 바닥의 글은 새로 새겨놓은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복천사기 기술은 정말 잘못되었다. 난 신미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공식 기록이 없으니 유구무언이다. 다만, 엄청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충청북도에서도 2010년 충북의 역사문화 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최시선 수필가·옥산중 교장

훈민정음 해례본이 1940년에 안동에서 발견되었듯이, 신미와 관련된 자료도 언젠가는 나오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다. 신미는 불경언해를 통하여 한글을 보급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세조가 1464년에 속리산에 온 이유도 오로지 신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신미는 훈민정음에 관한 한 세종과 함께 꼭 평가해야 할 인물이다. 혹여 한 승려로 치부한다면, 큰 우를 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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