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

드론으로 내려다본 옥산사거리 풍경 /최석묵
드론으로 내려다본 옥산사거리 풍경 /최석묵

오늘도 군줄고개를 넘는다. 40년 동안 해 온 일이다. 이제는 눈감고도 다닐 수 있다. 처음엔 울퉁불퉁하고 좁다란 꼬부랑 길이었다. 버스를 타면 하도 덜컹거려서 손잡이가 제멋대로 흔들렸다. 탁탁 소리를 내며 좌우로 천장을 두드릴 정도였다. 신혼 초에 시내에 있는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이 고개를 넘어 찾아왔었다. 하나같이 하는 말이 어찌 이런 산골로 시집을 왔느냐며 대놓고 불쌍해했다. 나는 그 길을 주로 남편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옥산사거리까지 왕래했다. 가끔 걸어 다니기도 했는데 그때가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다. 나중에 작은 자동차가 생겼을 때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좁은 고갯길을 운전하고 다녔다.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마다 보따리를 싸고 군줄고개 넘는 꿈을 수없이 꾸었다. 중학생 아들이 집을 뛰쳐나가 이 길로 달음박질한 적도 있다. 뒤쫓아간 아비가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아들을 붙잡아 왔었다. 빚쟁이들이 이 고개를 넘어 집으로 들이닥치기도 했다. 가난과 병마를 끌어안고 힘겹게 넘나든 적도 있다. 고갯마루 갈참나무 옆에 서서 아쉬움과 후회를 쏟아내기도 했다. 내 마음이 단단해질 무렵 주민들의 염원으로 고갯길이 평평해지고 조금 넓어졌다. 높았던 고개도 낮아졌다. 더러 기쁜 소식이 넘어오기도 했다.

매일 오가는 군줄고개에 정이 들면서 마을 일에 관심이 생겼다. 마을소식지를 만들어보자는 동네 사람의 제안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일곱 명이 뜻을 모아 팀을 꾸렸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취재하고 기사 쓰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좌충우돌하면서 간신히 8면으로 구성된 '옥산소식' 창간호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선보였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집집마다 일일이 방문해서 소식지를 전달했다. 하루종일 걸렸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충만했다. 그 느낌이 좋아 다음 호를 또 만들었다. 그러기를 15년째 하고 있다. 지금은 우편으로 발송한다. 그동안 동지가 20여 명으로 늘었다. 응원해주는 주민들의 소리도 많아졌다. 소소한 마을 이야기로 구성된 소식지는 열독률이 높다. 이웃 사람들이 지면에 나오기 때문이다.

소식지 발행에 참여하면서 마을 여기저기를 살피게 되었다. 지명에 얽힌 전설을 찾기도 하고 집성촌을 조사하기도 했다. 천수천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계리, 애호박 농사로 부농이 많은 신촌리, 독립운동가마을인 덕촌리와 장동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유명한 소로리, 조선시대 선비 박훈의 신도비와 수천암이 있는 환희리, 아직도 오일장이 열리는 오산리 장터, 강감찬 장군의 묘가 있는 국사리를 들여다보았다. 그 마을마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야말로 마을의 역사가 된다.

옥산소식 발행처는 '사단법인 옥산면복지회'다. 이 단체는 소식지 발행 외에도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은 기본이고 노인 복지, 장학금 지급, 환경 개선 등 주민들의 생활과 관련된 사업을 고루 펼치고 있다. 애향심과 문학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문학공모전도 두 번이나 개최했다. 이 모든 것은 관(官)의 개입 없이 순전히 옥산면 주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으로 해내는 일이다. 단돈 천 원부터 시작해 몇만 원까지 다달이 내주는 300여 명의 후원인이 참여하고 있다. 풀뿌리 복지가 실현되고 있는 마을이다.

정겨운 옥산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들을 참 좋아한다. 최근에는 구암마을에 있는 충현사를 보존하고자 애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충현사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곳이다. 70대가 넘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지만 얼마 전부터 젊은이들 몇몇이 동참하기로 했다. 앞으로 이들을 자주 만날 생각이다.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
김애중 기록활동가·수필가

스물네 살에 군줄고개를 만나 오늘에 이르렀다. 길은 젊어졌고 나는 조금씩 익어간다. 예전엔 먹고살기 위해 넘나들었다. 지금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있다. 도망 보따리 쌀 일도 이젠 없다. 대신 이야기보따리가 주렁주렁 열릴 것 같다. 옥산 마을이 점점 재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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